KOC는 한반도 전체 관할권을 버렸다
1947년 6월 20일 대한올림픽위원회 KOC는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IOC 총회에서 예비 인준됩니다. 예비라는 말은 KOC의 인준에 조건이 달렸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수립되는 것과, 현재 군사적으로 나뉜 남북한을 총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 조건이었습니다. 이 조건들은 한 국가는 하나의 위원회만 인준된다는 IOC의 규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IOC는 그렇게 한반도를 하나의 국가로 봤습니다.
1947년 당시 상황을 보죠. 한반도는 남북으로 군정 상태였고 국제적으로는 조만간 한반도에 정부가 들어설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다만 언제 어떠한 형식일지는 미지수였죠. 이 상황에서 한국은 IOC에 인준을 받고자 총회에 참석합니다. IOC 입장에서는 조금 망설여졌을 것입니다.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조만간 독립된 정부가 생길 것 같은 주체였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실체는 현재 서울에 근거를 두고 있으니, 한반도에서 나머지 반인 북쪽을 KOC가 실제적으로 관할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았던 것입니다. 한 국가에 하나의 위원회라는 원칙을 준용하다가 나중에 남북이 서로 다른 주체가 되면 IOC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질 터이니 말이죠.
예비 인준된 KOC는 나중에 다시 평가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일단 예비로 인준해 줌으로써 곧 있을 1948년 동계와 하계올림픽에 참가를 할 수 있도록 길은 열어주었지만, 국가올림픽위원회 NOC로서의 자격은 잠정적으로 다시 평가해야 할 숙제로 남긴 것이죠. 그리고 이 두 과제, 즉 독립정부와 한반도 전체 관할이 만족되는 경우 KOC는 문제없이 인준받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과 런던 하계올림픽은 한국이 참여하게 됩니다. 비록 불안정한 한반도 정세였고, 남북 어디에도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한국의 올림픽 참가는 별 탈 없이 진행됩니다. 그러나 1950년 한국동란은 이 모든 예상과 상황을 흔들어 버립니다. KOC는 한국동란이 진행되던 1952년 헬싱키 하계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합니다. 물론 1956년 멜버른 하계올림픽에도 선수단을 보냅니다. 문제는 북한 쪽의 선수가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전쟁과 분단 속에 KOC는 북한 선수를 올림픽 선수단에 포함시키지 않거나 못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북한이 가만있을 리 없었겠죠.
현실과 상황을 떠나 이 문제는 북한이 남한 정부와 KOC를 압박하는 목표점이 됩니다. 북한의 올림픽위원회(OCDPRK)는 KOC가 원래 인준될 때 위임받은 한반도 전역을 관할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KOC가 북한 선수를 올림픽 대표단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KOC가 원래 주어진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는 위원회이니, IOC는 KOC 이외에 한반도 북쪽의 자신들에게도 독립적인 NOC를 인준해 주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남북을 떠나 한반도에서 체육과 올림픽은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국제무대에서 자신을 알리고 뽐낼 수 있는 장은 당시로서는 올림픽과 같은 국제 스포츠 이벤트가 거의 유일했습니다. 그런데 KOC의 인준과 올림픽 참가,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서윤복의 세계 신기록 우승,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리나라 선수의 1, 2, 3 위 싹쓸이 등, 한반도 청년들의 국제 스포츠 마당에서의 위세는 대단했지만, 정작 이 모든 것은 거의 남쪽만의 잔치였던 것입니다. 북쪽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기량을 선보일 통로가 거의 막힌 상태였고, 이를 타계하려면 올림픽에 참가해야 하는데, 이 참가의 통로에 KOC가 버티고 서있었던 것입니다.
OCDPRK는 1956년 멜버른 하계올림픽 참가를 위한 인준 요청을 시도합니다. OCDPRK의 인준 요청은 이후까지도 번번이 무산됩니다. 나중에 다시 자세하게 얘기되겠지만, 북한의 IOC 진입은 KOC에 의해 좌절되다가 1963년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북한의 뒤를 봐주던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들, 그리고 KOC를 돕던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들도 상황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IOC는 지속적으로 KOC에 요구합니다. 북한 선수를 올림픽 선수단에 포함시키라고 말이죠. KOC는 이런저런 이유로 북한 선수 선발을 피합니다. 보다 못한 IOC는 1957년 불가리아 소피아(Sofia)에서 열린 총회에서 북한을 예비 인준합니다. 다만 조건이 붙었는데, 북한의 선수가 올림픽에 참가하려면 남측과 단일팀을 구성해야만 가능하며, OCDPRK는 북한 지역의 내부 업무만 관장하며 국제적 역할과 기능은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1957년 9월 23-26일, IOC 소피아 총회의 회의록은 이 결정과 조건을 대략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NORTH KOREA - Mr. Brundage gives a general survey of the position of Olympism prevailing in this part of the world. In compliance with the recommendation made by Mr. Andrianov, a provisional recognition of the Olympic Committee for North Korea is granted on the condition that its athletes will be allowed to compete in the Games only if they cooperate in forming one single team, thus grouping the competitors belonging to North Korea and South Korea. Failing an agreement between the two, North Korea will not be granted permission to compete. The situation is thus somewhat similar to that prevailing in the two Germanies, with the difference that North Korea is still at war with South Korea. The provisional recognition is valid only as far as internal affairs are concerned but is not valid on an international basis. In addition, the I.O.C. must examine the rules and regulations elaborated by the O.C. of North Korea before giving its approval and recognition.’ (4-1)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북한 ... 안드리아노프 위원의 권장에 따라, 북한을 조건부 인준하는 것으로 하며, 북한 선수의 경기 참가는 남북한 단일팀을 구성하는 것으로 조건을 둠. 두 단체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북한은 경기에 참석할 수 없음. 상황은 독일과 유사하며, 다른 점은 남북이 아직 전쟁 중이라는 것임. 조건부 인준은 내부적 업무 관련 사항에 국한되며, 국제 활동에는 유효하지 않음. 추가적으로 IOC는 북한의 규정과 규칙을 점검해야 하며, 이후 인준과 승인이 주어질 것임.’
국사편찬위원회는 북한의 OCDPRK가 IOC에 인준된 날을 1957년 9월 21일로 적고 있습니다. IOC 홈페이지에서 북한의 OCDPRK 인준을 1957년으로 적고 있는 이유입니다.
1957년 소피아 총회 이후 이 결정을 근거로, 북한은 지속적으로 남한에게 단일팀 구성을 요청합니다. IOC도 이에 동조하여 남한에게 단일팀 구성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남한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외면, 회피하거나 지연시킵니다. 보다 못한 IOC는 1962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총회에서 만약 남한이 단일팀 구성에 부정적이면 북한이 단독으로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의결합니다(4-2). 이 의결로 남한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립니다. 결국 1963년 남북 체육회담에 동의하고 참여했지만 최종적으로 이를 결렬시킵니다. 의도적이었죠.
남한의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 결렬로 1963년 10월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IOC는 1964년 도쿄올림픽에 한반도에서 두 팀이 출전할 것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4-3). 이로써 북한은 독립적이고 완전한 IOC 인준과 함께 올림픽 참가 자격을 갖게 됩니다.
1963년 바덴바덴 총회 결정은 KOC의 최초 위상에 대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KOC는 원래 한반도 전역을 관할하는 위원회였지만 이 결정으로 관할지역이 남한에 한정되게 됩니다. IOC와 국제사회는 마지막까지 단일팀을 요구했고 애초에 예비 인준에서의 조건을 수행하도록 요청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과 냉전시대는 KOC에게 위임된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도록 만들었고 남한은 그 관할권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 과정의 자세한 얘기는 다른 이야기 꼭지에서 다루도록 하죠.
인용 자료
(4-1)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Session 1894-2013. 02-Procès-verbal-eng. Minutes of the 53 session of the IOC in Sofia 1957, Sept. 23-28. pg. 4. OSC, IOC.
(4-2)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Session 1894-2013. 02-Procès-verbal-eng. Minutes of the 59th session of the IOC in Moscow, CIO. pg. 3. OSC, IOC.
(4-3)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Session 1894-2013. 02-Procès-verbal-eng. Minutes of the 60th session of the IOC in Baden-Baden, CIO. pg. 7. OSC, IOC.
사진설명
1963년 1월 22일 동아일보 8면 기사. ‘<우리대표> 전한국팀 조직제의, 24일 스위스서 북괴와 올림픽문제회담’ (남북한단일팀 구성을 위한 첫 번째 회담은 1963년 1월 24일과 2월 6일, 두 차례 스위스 로젠에서 열린다. 기사는 남한이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을 제안하는 것으로 제목을 적고 있다. 사실 남한은 IOC와 북한의 요구로 회담에 동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