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구소스

주방에서 배우는 사랑

by 오솔


내게 음식을 만드는 일은 하나의 힐링과도 같았다. 단단한 야채를 물에 씻고, 큰 뭉텅이로 썰어내면 상큼한 향이 콧속으로 스며든다. 손질한 재료들은 센 불에 빠르게 볶아내기도 하고, 약불에서 천천히 구워줄 수도 있다. 이때 좋은 기름을 두르면 재료의 풍미가 더욱 올라가면서 다채로운 향이 퍼져 나온다. 끝으로 정갈하게 접시에 담아 식탁으로 옮기면 이제 혀가 즐거운 시간이다. 혼자 먹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와 함께 먹으며 대화를 곁들이면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이 펼쳐진다. 그렇게 음식을 만들고 먹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한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아이가 생기면서 매일 전쟁 같은 육아 현장을 보내다 보니, 요리하는 기쁨을 누릴 여유도, 남편과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는 즐거움도 사라졌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일만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되기에 대부분의 요리는 시판 밀키트를 5분 만에 조리한 것들이다. 밥 한 술이라도 뜨려 하면 아이는 칭얼대며 내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그럼에도 나는 ‘육아는 체력전이다’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며 꾸역꾸역 밥을 욱여넣는다. 그렇게 요즘의 나는 육아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 끼니를 겨우 때울 뿐이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이를 위한 특식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최근 들어 아이가 밥을 잘 안 먹는 날이 잦아지면서 무언가 대책이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비한 회심의 메뉴는 ‘라구소스’였다. 라구소스는 토마토를 활용한 이탈리아식 소스다. 파스타에 곁들여도 좋고, 밥에 얹어서 먹어도 맛있다기에 곧바로 도전해 보았다.



우선 알록달록한 채소들을 한데 모아 깨끗이 씻어냈다. 토마토에 십자 모양으로 칼집을 내주고 끓는 물에 살짝 데쳐주었다. 그러면 토마토의 질긴 껍질이 쉽게 벗겨지고 부드러운 과육만 남는다. 보드랍고 뽀얀 토마토 과육은 믹서기에 갈아주었다. 한편에서는 소고기와 양파, 당근, 가지, 마늘을 잘게 다졌다. 이제 프라이팬을 꺼내 가스불을 켠다.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마늘, 야채, 소고기를 차례로 볶아준다. 재료들이 익으면 믹서기에 갈았던 토마토를 넣고 끓인다. 이때, 달큼한 채수도 함께 넣어 토마토의 시큼함을 잡아준다. 한참을 끓이다 보면 토마토가 뭉근해지면서 소스처럼 걸쭉해진다. 그렇게 되기까지 한 시간가량을 잘 저으면서 끓여주었다.


아이의 요리는 어른의 요리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큰 덩어리로 주면 목에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잘게 다져야 하고, 생으로 먹는 채소도 되도록 푹 익혀서 주어야 한다. 어른의 음식은 온갖 양념을 써서 부족한 요리실력을 덮을 수도 있지만, 아이의 요리는 간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재료 본연의 맛과 향에 충실해야 한다. 무척 수고롭고 어려운 과정이다. 그래서인지 아이 음식을 열심히 해먹이면서도 그 과정이 힐링되거나 마냥 즐겁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가 못된 엄마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엄마들은 내 새끼 입에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데, 나는 요리하고 먹는 나만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 같아 서글펐다.




하지만 그날, 한참을 끓으며 보글거리는 빨간 거품,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새콤한 토마토 향을 맡으며 문득 생각했다. 이런 기다림의 시간이 아이를 키우는 마음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 밥을 안 먹으려 딴짓을 하거나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보면 화가 나고 속상하다. 그럼에도 “그래, 네가 정말 먹고 싶을 땐 먹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참아본다. 어느 날은 “어떤 음식을 해주면 더 잘 먹을까?” 고민하며 아이가 잘 먹어줄 순간을 기다린다. 혹시 아이가 잘 안 클까 봐 불안해지는 마음을 어렵지만 꿋꿋이 견뎌본다. 아이와 더불어 내 가족을 먹이는 음식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기다림과 인내를 담아야 하고, 나의 감정은 내가 극복해 내야 하는 것. 소소한 기쁨이 담긴 이전의 요리와는 다르다. 묵직한 책임을 짊어진, 매일의 충실한 애씀이다.


무엇보다 그건 엄마로서 필요한 사랑과 참 닮아있다. 고통과 인내를 동반한 사랑. 아이가 가는 길을 한 발 뒤에서 따라가며 기다려주는 사랑. 결국 아이 음식을 만든다는 건 그런 사랑을 조금씩 체득하는 과정이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이전에 요리하며 느낀 힐링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뜨끈하고 진득한 라구소스처럼, 끓을수록 풍성해지는 토마토 향기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완성된 라구소스를 밥과 함께 귀여운 곰돌이 모양 그릇에 담았다. 음식이 적절한 온도로 식기를 기다리면서 아이를 쳐다봤다. 뭐가 그리 신난 지 온 집을 활보하며 돌아다니다가 내게 와서 푹 안긴다. 내 마음이 말한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다.” 또 다른 삶의 힐링이 내게 왔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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