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밀수제비

부드럽지 않아도 괜찮은 날

by 오솔


“크리스마스 그게 뭐 별 건가.”

남편에게 기념일이란 그냥 365일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소소한 기념일부터, 명절, 크리스마스까지. 모든 특별한 날에는 한껏 기분을 내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일 년 중 12월을 가장 좋아하는데 연말에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공기를 너무도 좋아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서든 반짝이는 트리 장식이 보이고 은은하게 캐롤이 울려 퍼진다. 추위를 뚫고 들어간 카페에선 따뜻한 커피향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한쪽 구석에는 혼자서 책을 읽고 다이어리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추위가 있어 더 따뜻해지는 시간, 화려하기에 더욱 잔잔해지는 온기, 함께이면서 또 혼자인 시간. 연말은 모든 것이 공존할 수 있다. 차이도, 다름도 그저 함께 어우러져 풍성한 빛이 된다.


남편과 나는 몇 년 간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왔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걸 피곤해하는 우리는 주로 집에서 맛있는 한 끼를 차려먹으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곤 했다. 메뉴는 거의 비슷했는데, 커다란 스테이크 고기를 하나 굽고, 파스타 하나를 만들어서 먹었다. 와인을 간단히 곁들여 먹다가, 다음 날이면 남은 와인에 과일과 시나몬을 넣어 뱅쇼를 끓여 먹었다. 그런 게 가장 크리스마스다운 식탁이고, 편안한 마무리였다.


그러나 올해는 놀랍게도 남편이 먼저 제안을 했다.

“우리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새로운 메뉴로 먹어볼까? 그동안에는 당연스럽게 양식만 먹었잖아. 새로운 우리만의 메뉴가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아.”

처음에는 남편의 제안이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다. 요리는 거의 내가 하는데, 메뉴 기획에 저렇게 성실할 일인가 싶었다. 그러나 본인이 요리를 해도 괜찮다고까지 하니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결국 요리는 내가 하긴 했다.) 아마도 요즘 <흑백요리사> 예능을 보면서 요리에 관심을 기울여가는 것 같다. 그렇게 평범한 날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무던하게 기념일을 생각하던 그가 이제는 기념일 메뉴 기획에 열정이 샘솟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우리는 치열한 토론 끝에, 올해 성탄절 메뉴를 수육과 수제비로 정했다. 요리가 어렵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풍성한 음식. 아이와도 함께 먹을 수 있는 슴슴한 음식이었다.




크리스마스 날, 조금 일찍 요리를 시작했다. 수제비는 미리 반죽을 해놓고 숙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손수제비를 만들어본 적은 별로 없어서 조금 걱정이 됐지만, 내가 애용하는 요리 블로거를 믿고 시작해 보았다. 특별히 우리 가족의 건강을 생각해서 통밀가루로 준비하기도 했다. 밀가루와 약간의 물, 기름 몇 방울을 부어준 뒤 손으로 치댔다. 진득진득한 반죽덩어리를 만지니 기분이 좋았다. 어린 시절 찰흙놀이를 하듯 신이 났다. 그렇게 반죽을 충분히 치댄 후 냉장고에 넣었다.


아이의 낮잠 시간, 남편과 나까지 온 가족이 낮잠을 푹 잤다. 잠에서 깨자, 가장 먼저 반죽이 생각났다. 말랑하고 풍성해졌을 반죽을 상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열어보았다. 그런데 반죽이 돌덩이처럼 딱딱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치대고 주물러보아도 여전했다. 수제비 대신 다른 음식을 만들어야 하나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며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우선 반죽에 물을 적게 넣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통밀로 반죽을 했기 때문이었다. 통밀은 일반 백밀가루보다 거칠기 때문에 뭉쳤을 때 부드럽고 찰진 느낌이 덜하다. 때문에 같은 양의 물을 넣어도 말랑거리기보다 딱딱해질 수 있다. 우선 냉장고에서 꺼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15분 정도 반죽이 말랑해지길 기다렸다. 여기에 물을 조금씩 부으며 다시 반죽을 치대 보았다.


그렇게 조금 나아진 반죽으로 수제비를 끓이기 시작했다. 다시마와 보리새우, 채소를 우려낸 국물에 양파와 애호박, 당근을 넣고 한소끔 끓여냈다. 그리고 수제비를 한 점씩 떼어 넣었다. 뜨거운 국물의 습기가 손을 타고 얼굴까지 닿았다. 가만히 반죽을 떼어 넣고 있으니 따뜻하고, 편안했다. 한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식탁은 무사히 차려졌다. 오랜 시간 푹 끓여낸 수육과 짧은 시간이었지만 희로애락이 담긴 손수제비. 소박하지만 풍성한 우리만의 파티가 시작되었다.



수제비를 한점 떠먹자 따뜻한 국물과 쫀득한 면발이 들어왔다. 통밀이라 부드러운 식감은 아니었지만, 되려 식감이 살아있고 구수한 통밀향이 퍼졌다. 문득 식탁 앞을 바라봤다. 남편은 수육 한 점을 집어 야채와 함께 쌈을 싸먹고 있다. 그 옆에서 아이는 손으로 수제비 반죽을 조물거리다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고 있다. 순간 신기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서로 알지도 못하던 남자와 이제는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있고, 몇 년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아이는 지금 내 앞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있다. 기념일에 의미를 두지 않던 남편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설레하고, 기념일을 중요시하던 나는 별거 없는 크리스마스가 이렇게도 편안하고 행복하다. 너무도 달랐던 두 사람이 조금씩 섞여가고 어우러져가는 시간. 그 시간을 축하하듯 식탁 옆면 벽에 걸려있는 리스가 반짝거렸다.




사실 우리의 일 년은 반짝이지 않았다. 바쁜 일상을 살아내며 남편과 나는 서로에게 예민해진 적이 많았고, 싸우는 날들도 많았다. 어쩌면 이 통밀처럼 서로에게 딱딱하고 까칠했다. 연애시절 누리던 스테이크, 파스타보다 결혼과 육아는 좀 더 거칠고 고된 맛들이 가득했다. 어디 그뿐일까. 종종 갈등과 혼란의 시간이 찾아올 때면, 실패한 반죽처럼 가슴속에 딱딱한 돌덩이 하나가 내려앉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거친 시간을 수없이 치대며 더 단단하고 끈끈한 부부가 되어가고 있다. 오랜 시간 숙성되길 기다려야 했고 적지 않은 힘이 들어갔지만, 그 뒤에 오는 따뜻하고 깊은 맛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내겐 오늘의 식탁이 소중하다. 그리고 이런 날은 아무렴 다 괜찮다. 연말이고, 전구는 반짝거리고, 우리 앞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선물 같은 아이가 있으니까.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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