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라페

집이라는 일터에 놓인 작은 낭만들

by 오솔


주부가 된 지 어느덧 3년가량 되었다. 3년의 시간은 길고도 짧았다. 하루하루를 들여다보면 참 길게 느껴지는데, 지나온 시간은 쏜살같다. 그동안 나는 임신 기간을 보냈고, 뱃속에 있던 그 아이는 어느덧 20개월이 되어간다. 주부이자 엄마로 지내면서,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머무르는 곳은 ‘집’이 되었다. 예전에 내게 집이란, 회사를 벗어나 잠시 쉬는 휴식처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쉼이 아닌,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가끔은 쉼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잠시 누워 tv라도 보다 보면, 이내 눈길은 다른 곳으로 돌아간다.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 아이가 늘어놓은 장난감, 밀려있는 빨래더미. 아직 내 손이 닿지 않은 곳들이 보인다. 그것들이 마치 쌓여있는 일더미처럼 느껴져 마음이 갑갑해진다. 그래서 때론 집 앞 가까운 곳이라도, 밖에 나가는 게 오히려 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느샌가 내게 집은 치열하고 갑갑한 노동의 현장이 되었다. 일과 쉼의 경계가 무너진 공간이다. 동시에 내 삶을 이루는 많은 것들이 뒤섞인 공간이, 바로 집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 안에도 한 줄기의 빛이 있으니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집 안에 나만의 작은 등불을 놓기 시작했다. 남편도, 아이도 잘 알지 못하는 작은 불빛들을 세워놓는다. 주방 선반에 차곡히 놓인 바싹 마른 소창행주들, 욕실 앞에 펼쳐놓은 보드라운 발매트, 어지러운 짐방에 놓인 나만의 작은 책상이 그렇다. 가족들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아끼는 가족사진 액자와 책상 한쪽에 쌓인 다이어리 묶음들이 그렇다. 종종 피곤하고 답답해질 때면 그것들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등불을 켠다. 그리고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불빛에 몸을 녹이며, 마음을 풀어헤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낭만이란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이 공간에도 낭만이 살아있구나 깨닫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회사에서 행사가 있었다며 꽃다발 더미를 한가득 가져왔다. 귀찮아서 방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아두다가, 시들기 시작하는 걸 보고 당장 꽃정리를 시작했다. 주방으로 가 텀블러와 물병을 가져왔다. 지저분한 잎들을 떼어내고, 기다란 줄기는 잘라주었다. 꽃꽂이를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나선형으로 꽂아주는 게 풍성하고 예쁘다고 들었다. 그것을 떠올리며 이리저리 꽃을 꽂았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꽃향기와 파릇파릇하고 차가운 잎의 감촉이 좋았다. 텀블러와 물병에 풍성하게 담긴 꽃들은 우리 집 여기저기에 놓여 또 다른 등불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한 남편과 낮잠 자는 아이로 인해 혼자 고요한 시간을 맞이했다. 무엇을 할까 하다가, 거실 선반에 놓여 있는 주황빛의 꽃이 보였다. 그리고 같은 주황빛의 음식이 생각났다. 꽃처럼 싱싱하고 상쾌한 메뉴, 꽃의 낭만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브런치메뉴인 당근라페가 먹고 싶어 졌다. 당근은 남편이 좋아하지 않는 식재료라, 당근맛을 충분히 살리는 당근라페는 혼자 있을 때만 해 먹는 요리이다.


우선 당근을 깨끗이 씻어 얇게 채 썰어 주었다. 채 썬 당근을 커다란 유리볼에 한가득 쌓이도록 담았다. 그리고 소금과 올리브오일을 약간 넣어서 잠시 절여주었다. 당근이 조금 절여지자, 물을 따라 버리고 본격적으로 맛과 향을 첨가해 준다. 레몬즙으로 상큼함을 넣어주고, 홀그레인 머스터드로 시큼하면서 쌉쌀한 향을 더해준다. 향긋한 올리브오일을 또다시 충분히 둘러준 뒤, 알룰로스나 꿀을 살짝 넣어 달콤함을 더해준다. 가볍게 젓가락으로 섞어주면 간단한 당근샐러드가 완성된다.



마침 남아있는 식빵이 있어 당근라페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커피 한 잔을 곁들여주자, 나만의 훌륭한 브런치가 완성되었다. 낮잠 자는 아기가 깰까 봐 음악은 틀지 않았지만 이미 내게는 카페 음악이 맴도는 듯했다. 집 안 곳곳에 보이는 꽃들과 상큼한 당근라페의 향. 이것으로 오늘의 낭만은 충분히 채워졌다.





행복은 함께일 때, 낭만은 혼자일 때 온전히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낭만은 생각보다 별게 아니라고 느낀다. 전쟁과 고난 속에서 꽃피는 사랑이 강렬한 것처럼. 단조로우면서도 바쁜 노동의 현장 속에서도 작은 것들이 충분히 낭만적일 수 있다. 주황빛의 꽃이 보이고, 당근라페의 맛은 신선하고 상큼하다. 잠든 아이의 방 너머로 나는 조그만 책상에 앉아있다. 그렇게 나의 낭만지수는 한껏 채워진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쭈글거리는 행주에, 공짜로 받은 꽃 따위에, 5만 원짜리 책상 하나에 왜 낭만을 느끼고 있냐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지금 내게 낭만은 꽤나 값싼 것이라고. 어디에나 있고, 언제든 누릴 수 있는 거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내 표정은 꽤나 밝을 것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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