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생이무굴국

바다의 추위를 삼키듯

by 오솔


나는 이따금씩, 겨울의 바다에서 깊은 슬픔을 본다. 젊은 날의 한 겨울, 혼자 제주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화려한 관광의 도시, 들뜬 마음으로 일상을 벗어난 사람들이 가득한 제주에서 나는 혼자임을 택했다.


나는 바닷가 주변의 산책로를 계속 걸었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언덕의 능선과 그 끝으로 이어진 절벽 바위가 보였다. 바위의 거친 면을 거대한 파도가 계속 때렸다. 추운 날이었기에 바닷속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때는 물놀이를 하며 바닷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한 여름바다를 좋아했었다. 그러나 홀로 제주의 바다를 마음껏 본 뒤로, 바다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겨울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끼어들지 않는 거대한 바다. 고요하고 잔잔한 물결. 그리고 그 잔잔함이 무색하게 계속 밀려드는 거친 파도. 나는 그게 인간의 심연에 있는 어떠한 슬픔과도 같다고 느꼈다.


요즘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깊은 슬픔은 그냥 품고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 그것을 꺼내어 분석해 보거나 해결하려 하는 순간, 오히려 그 슬픔에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언젠가 단단한 어른이 되어 그것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거나 슬픔이 사그라들 순간을 기다린다. 지금은 그냥 내 일부로 받아들이고, 잔잔한 물결에 어느 정도 몸을 맡기는 게 편하다.




그러나 그렇게 평온하게 받아들이면서 지내는가 싶다가도, 문득 거센 파도가 되어 그것이 밀려들어올 때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속수무책으로 파도에 갇힌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눈물과 짜증으로 튀어 오른다. 가족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 주고받는 눈빛 안에서도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터져버리기도 한다.


최근 그런 파도를 마주했다. 그러면서도 그냥 평소에 하던 요리를 하고, 평소와 다른 것이 있으면 기록했다. 짜증과 울분이 올라오던 순간, 자연스레 주방으로 향했다. 그 날 만큼은 슬픔을 달랠 요리를 하고 싶었다. 겨울바다의 향이 짙게 배어있는 요리, 그리고 깊고 따뜻한 맛이 그리웠다. 제철요리를 통해 몸도 더 충전하고 싶었다. 그날의 메뉴는 매생이무굴국이었다.


매생이무굴국은 그야말로 겨울스러운 음식이다. 단단한 바위에 딱 붙은 이끼처럼 생긴 매생이. 향긋한 바다내음이 짙게 배인 굴, 추위를 머금을수록 더욱 달고 탄탄해지는 무. 겨울을 가득 담고 있는 세 가지를 한 그릇에 만날 수 있는 든든한 보양식이다.


요리 과정도 굉장히 쉬운데, 매생이와 굴을 깨끗이 세척하는 것만 신경 쓰면 차례로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 우선 매생이와 굴은 굵은소금을 이용해 세척해 주었다. 찌꺼기를 내뿜은 재료들을 흐르는 물에 다시 한번 조심스레 씻어주었다. 매생이를 손으로 만지면 부드러운 실뭉치 같다. 게다가 굴도 만져보면 미끌거리면서도 야들야들해 손끝의 섬세한 감각이 살아나는 듯했다. 재료를 씻어낸 후 끓는 물에 다시마와 무를 넣어 국물을 우려냈다. 거기에 굴을 넣고 한소끔 끓이다가, 마지막에 매생이를 넣고 풀어주며 간장으로 간을 더해주었다.



그렇게 슬픔을 시작으로 했던 국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나와 남편, 아이는 모두 따뜻한 저녁을 먹었다. 그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슬픔의 끝이 꼭 슬픔을 덜어내는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이다.


무는 추위를 머금으면서 달고 단단해진다. 단단해진 무가 따뜻한 물에 담겨 끓으면 뭉근하고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시원하고 깊은 향이 국물에 배어들어 요리의 풍미를 높여준다. 내게 겨울무는 참으로 귀한 식재료다. 추위를 머금고 있어서 더 깊은 맛을 내는, 특별한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따뜻해진 무를 먹으며 내 마음속 거센 파도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렇게 나는 계속 따뜻한 국물을 들이켰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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