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연필깎이에 꽂혀 긴 몸통을 깎아내고 깎아내길 수십 번. 곁에 있었던 긴 시간만큼이나 깎여 나간 사랑, 추억, 눈물, 상처와 같은 부스러기들. 서랍에 담긴 부스러기들이 너무 많아서 그 속에 담긴 게 사랑인지 애증인지 원망인지 이별인지 뭔지도 몰랐지. 더 이상 깎여나갈 게 없는 몽당연필이 될 즈음 그제야 나는 더 이상 너라는 연필깎이에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나. 내 안에 단단히 박힌 심이 부러지도록 난 너에게 진정 제값을 다했나. 잔인하게 깎여 나가도 그게 그저 너라서 좋았나. 뭉툭해진 연필심으로라도 난 너를 사랑하고 싶었네. 뾰족한 마음이 모조리 다 잘려나갈 때까지. 그때까지 난 너를. 난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