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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다

우리가 약속을 할 땐 새끼손가락을 걸어야 해

by 최다은

'아 네가 이런 사람이었지'라는 문장을 쓰게 만드는 사람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아, 네가 이토록 따듯하고 감동적인 사람이었지'라는 자각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사람과 '아, 전에도 네가 이래서 내가 실망하고 외면했었지'라는 자각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사람이다.


내 곁에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과 멀리 두고 싶은 사람을 구분 지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관대한 걸지도, 아님 그냥 굼뜬 걸지도 모른다. 나는 첫인상, 첫 만남으로 그 사람의 모든 걸 판단하고 단정 짓지 않는 편이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선인이 누군가에겐 악인으로, 누군가의 악인이 누군가에겐 선인으로 여겨지는 일을 많이 보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나와 그 사람 사이의 선을 말랑말랑한 상태로 두고, 만남을 거듭하며 그 선을 점차 규정짓는 편이다. 또,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엔 정말 최선을 다하려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속을 끓이고, 스트레스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관계의 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있는 나도 더 이상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바로 기본적인 약속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다. 언제 한 번은 모델 준비할 때 알던 동생에게 갑작스레 연락이 왔었다. 그 연락은 통상적인 안부 인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동생과 말도 몇 번 섞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의 연락에 반가우면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연락이겠거니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나를 만나고 싶어 했고, 나는 알 수 없는 의구심은 접어두고 강남역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원래 약속 시간에서 3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에게 내가 기다릴 수 있는 최종 시간을 통보했다. 그는 지금 급히 택시를 탔지만 차가 막힌다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로 자신의 지각을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내가 정한 시간까지 끝내 오지 않았고, 나는 총 1시간이라는 시간을 들여 그를 기다린 꼴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즉시 그와의 관계를 끊어내었다. 그는 거의 다 왔다며 우는 아이를 달래듯 나를 끝까지 회유하려 하였지만, 나는 내가 베풀 수 있는 인내를 다 베풀었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그의 연락처를 차단하였다.



나는 이처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제일 우선시돼야 할 가치는 바로 '신뢰'라고 생각한다. 신뢰가 없는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불안정한 지반에 높은 둑을 계속해서 쌓아 올리는 거나 다름이 없다. 또 상호 간에 서로의 노력이 없으면 깨진 신뢰는 회복하기 더욱 어렵다. 누구 한 사람만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다. 나는 약속을 잡을 때 이 약속이 전과 같이 취소가 되는 건 아닐지, 약속된 그날에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걱정하게 만드는 사람과의 관계를 굳이 지속하고 싶지 않다. 약속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 곧 관계의 무게를 아는 사람과도 같다고 생각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하고픈 사람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내가 지금껏 쓴 수많은 글과 문장들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약속의 무게를 점잖게 짊어지는 어른이 되는 일. 그건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과 지켜야 하는 약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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