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다 덤벨을 쾅쾅 내려놓는 소리에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진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하필 그날은 귀를 보호할 에어팟이나 헤드셋을 따로 챙기지 않은 터라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 험한 소음과 진동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혹 이런 내 마음을 알아줄까, 인상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를 몇 번이나 힐끗 거리기도 했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그 사람은 아랑곳 않고 ‘자신만의’ 요란한 운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뿐이었다. (직접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소음이 거슬린다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 통할 거란 보장도 없고 괜히 얼굴 붉힐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의 거친 동작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그 사람의 머릿속엔 온통 ‘자신의 운동에 대한 집념’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각자의 운동에 집중하고 있는 헬스장의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란 뭘까. 요즘 들어 더 되뇌고, 더 세밀하게 뜯어보는 대목이다. 아직 하나로 답이 추려지진 않았지만 현재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내가 나를 위해주는 것만큼 다른 사람 또한 나처럼 위해주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내가 나를 생각해줘야 하는 명제를 깔고 들어간다. 내가 나를 별로라고 생각하거나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에게도 그렇게 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존감이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다.
보통 자기 자신의 자아가 강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남을 생각해 주거나 공감해 주는 능력이 떨어지곤 한다. 나의 시선과 관점만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을 대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잘 아는 이유는 더 갈 것도 없이 지난날의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나의 생각이나 말을 남이 들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생각을 잘하지 못 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나 말을 그저 그때그때 내뱉기에 바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눈치는 또 빨라서 상황 판단은 꽤 잘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나의 성격 때문에 많이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 마저도 이해나 공감을 잘하지 못했다. 나 때문에 서운하다거나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보면 “이게 울 일인가?” 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채로 내게 토라진 이들을 내버려 두거나 달래기 바빴다.
지금 와서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굳이 꼽자면, 나는 어렸을 적부터 내가 누군가에게 너그럽게 받아들여지거나 공감받지 못했기에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 눈물을 보이거나 울음을 터뜨리면 줄곧 들었던 말도 “뻑하면 우냐?”라든가, “그게 울 일이야?”와 같은 뉘앙스의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응석이나 어리광이 잘 통하지 않는 상태로 내가 나 자신을 다독이거나 터져 나오는 감정을 그때그때 억누르기 바빴다. 그때의 나는 아마 감정을 모아 놓는 팔레트에 몇 가지의 색밖엔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하는 심각한 고민까지 한 적도 있다. 비교적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애들이 불편했고, 잘 삐지지 않는 남자애들이 더 편해서 그들과 더 잘 어울려 놀곤 했다.
그러던 내가 감수성이 짙어지기 시작한 건 아마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일 거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냥 내 마음을 어디엔가 털어놓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에 대한 생각과 남에 대한 생각의 비례가 조금씩 맞춰져 갔다.
MBTI에서 흔히 T는 사고, F는 감정의 성향이 더 발달했다고 한다. 요 근래 내 MBTI를 유추하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F가 섞인 MBTI를 답하곤 한다. 그런 대답을 들으면 괜히 뿌듯하다. 왜냐하면 난 그만큼 내가 남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오래 이어나가는 방법도 사실 이론적으로만 보면 별로 어렵지 않다. 나를 생각하기 앞서 남의 생각 또는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알면 되기 때문이다. 내 앞에 앉아있는 상대가 받고 싶은 관심을 보여주고, 하고 싶은 말을 들어주고,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면 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갈등이나 싸움 따윈 없는 아름다움에만 고취되어 살아갔을 것이다.
연애를 오래 이어나가는 이들의 공통점도 보면 사실 다 비슷비슷하다. 최근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 친구 J의 일화를 하나 들었다. 이야기의 요는 자기는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는데 남자친구가 그 행동에 몹시 서운해하고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걸 안 J는 마음이 무척 아팠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는 남자친구에게 그런 행동을 안 할 것을 ‘자의적으로’ 다짐했다고 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게 싫다는 이유였다.
어떻게 보면 정말 상식적이고 당연한 생각과 마음이겠지만, 남이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하여금 상처를 받고 아픈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혹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과 행동을 계속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지 않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잘 이어나가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은 물론이고, 끊임없이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고 배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에 따른 행동도 지켜져야 하고 말이다. 특히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서툰 이는 관계에 대한 공부 또한 뒷밤침 되어야 할 것이다.
기기기익[己飢己溺] ‘자기가 굶주리고 자기가 물에 빠진 듯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나 아픔을 준다면 그건 곧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나 아픔을 받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처나 아픔, 원망, 슬픔 또한 마찬가지겠지만 웃음이든 존중이든 사랑이든 희망이든 결국은 내가 준 만큼 돌려받게 된다. 늘 희망적일 순 없지만 늘 절망적이고 싶진 않다. 늘 좋은 사람일 순 없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고의적으로 상처를 주거나 아픔을 안겨주고 싶진 않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내 앞에 놓인 날들을 우직하게 걸어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