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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은 Sep 14. 2019

영화 <연애의 온도>를 보고 나서

동희와 영을 통해 본 보통의 연애에 대하여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2013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지인에게 ‘그 영화 재밌어’라는 어쭙잖은 추천을 받아 보게 된 게 희미한 기억의 잔상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사실 나는 어떠한 공감도 할 수 없었다. 김민희와 이민기의 극히 현실적인 연기에 감탄을 한 게 전부였다. 그 당시의 나는 오래 연애한 친구의 감상을 빌려 ‘맞아, 그렇더라.’라는 맞장구를 칠 수밖엔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나는 오랜 연애를 꿈꾸던 귀여운 스무 살이기도 했으며, 연애 경험이라곤 다 합쳐서 1년도 안 되는 풋내기였기 때문이다.


 영화 인트로에 나오는 동희와 영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나는 언제쯤 저런 연애를 할 수 있을까?’라는 부푼 마음을 가지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19년 현재, 내게 이 영화는 그 당시와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지금도 내가 동희와 영의 연애를 100%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 기획한 <연애의 온도>는 어찌 됐든 타인들의 이야기를 빌린 것이기 때문에 나의 연애와 완벽히 일치할 수는 없다.


 사랑의 크기가 클수록 증오의 크기도 크다. 세상에 얼마나 성숙한 연애가 난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애란 원래 유치한 법이다. 게다가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연애의 수준은 달라질 수 있다. 게 아무리 점잖은 사람일지라도 친구에게 미처 말하지 못 한 속 사정은 다들 마음 한편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남의 연애를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다. 유치할 수도, 찌질 할 수도, 비상식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둘의 ‘사랑’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연애의 온도>를 본 사람들 중에는 ‘쟤네 왜 저래’, ‘남자 완전 미친놈 아냐?’, ‘여자도 참 대단하다’ 등등 그 또는 그녀를 비난하는 시각도 존재할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폭력적 기질이 다분한 동희와 뒤끝의 끝판왕인 영을 보면서 ‘꼭 저렇게까지 해야 되나?’라는 생각을 가졌으니까. 그 둘을 지켜보는 친구들도 꽤나 속이 터졌을 것이다. 동희와 영은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골 때리는 커플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커플이다. 세상엔 그들보다 더한 커플들도 많다.


 남들 눈엔 그저 미친놈, 미친년으로 보일지라도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쉽게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사랑’이니 끝까지 붙잡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정의하는 연애며, 사랑이다. 셀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도, 서로를 포기하고 싶은 수십 번의 고비를 버티며 단단해지는 것.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낸 영, 그리고 영과 잠자리를 했다며 떠들고 다닌 남자를 피떡이 되도록 때린 동희. 그런 동희를 다시 찾아 나서는 영. 2013년엔 그토록 이해할 수 없는 순간과 장면들이었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래 연애할수록 함께한 기간에 얼룩진 실수와 상처들은 둘이 넘어야 할 허들이 되며, 그 허들을 제대로 넘지 못하면 둘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꽤나 애를 먹을 것이다. 결국 그 허들을 넘지 못 한 동희와 영, 그리고 과거의 나와 남자 친구처럼. 실수는 용서해야 하며, 상처는 치유해야 한다. 이 공식을 따르지 않으면 서로는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충돌할 수밖에 없다.


 결론은 연애에 제대로 된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연애 상담을 해오는 이들에겐 해답을 제시해줄 것이 아니라 일정의 공감과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뜯어말리고, 회유를 해도 만날 사람은 만난다는 것. 나는 언제나 당신의 선택을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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