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내가 날 미워했던 이유

전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요

by 다은

27살에 한 남자를 만났다. 출근길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만남이 시작된 우리는 서로의 조건을 모른 채 연애를 시작했다. 상대는 나와 같은 전공에, 그와 관련해 창업을 구상 중이던 3살 연상의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마냥 좋다가도 만남이 지속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학창 시절 가난해 도시락을 쌀 수 없었던, 자수성가한 공무원 출신 아버지에게 항상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교관이라는 원대한 꿈을 접고, 반수를 해서 대학을 바꾼 뒤 좀 더 안정적이고 제주에 있을 수 있는 직장을 선택했었다. 서로 결혼하고 싶어 하는 우리를, 부모님이 좋아할 리 없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우리는 9개월의 짧은 인연을 정리했다. 그를 만나면서, 그와 헤어지면서, 그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부모님과 자주 다퉜다. 전까지는 한 번도 부모님께 반항이란 걸 해본 적이 없던 내가 부모님께 울며 악다구니를 썼다. 내가 우니 엄마도, 아빠도 울었다. 마음을 정리하기 많이 힘들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 헤어졌는데 정작 나는 그를 오랫동안 마음에서 보내주지 못했다.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육지에 있는 친구가 물어물어 제주에 있는 한 남자를 소개시켜줬다. 그동안 어른들을 통해 들어오는 선도 다 거절하고, 친구들이 주선해주는 소개팅도 다 거절했는데 그날은 웬일로 친구에게 소개 자리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게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소개로 만난 나와 동갑인 그 남자는 다정하고 서로 말이 잘 통했다. 그렇게 나는 그 남자와 다시 사랑을 시작했고 1년 6개월의 연애 후 결혼을 했다. 차분하고 성실한 남자였다. 다만 자정 넘어서까지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았고, 주말 근무가 잦았다. 일한 만큼 수당을 받지 못했다. 나름 워라밸이 있는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나에게 남편의 직장생활은 힘들고, 합리적이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이전의 사랑과는 달리, 부모님에게 더 당당하게 우리의 사랑을 검증받고 싶었다. 결혼 전부터 남편에게 이직을 권유했고, 남편은 그런 나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하던 30살의 6월,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다음 달, 감사하게도 첫 아이를 임신했다. 기쁜 소식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남편의 사직과, 이직 준비 시작의 시기였다. 남편은 전공을 살려 공무원, 공기업 준비를 한다고 했다.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아침 새벽 도서관으로 향하는 남편에게 배불뚝이 나는 초보지만 정성을 다해 아침을 차려주곤 했다.

남편이 공부를 시작한 지 100일 정도 되었을까. 그쯤부터 우리는 자주 다퉜다. 남편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불만이 생겼다. 학창 시절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던 나는 고3일 때, 재수생일 때, 취업 준비 때 잠자고 밥 먹는 시간 빼고 공부만 했다. 그런 나를 가족들은 지독하다고, 그만하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나는 남편에게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남편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랑 싸워 속상했던 남편이 도서관에서 일찍 온 날에는 더 큰 다툼이 벌어지곤 했다.

남들처럼 주말에 함께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고 데이트를 할 수 없는 것도 속상했다. 배는 점점 불러오고 혼자 있는 시간은 점점 쓸쓸해졌다. 남편이 열심히 공부하러 갔으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숙하지 못한 내가 싫었다. 신혼집 침대에 혼자 누워 훌쩍거리는 날이 늘어갔다. 남편과 싸운 날은 가슴이 답답해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치며 울기도 했다. 계속되는 다툼에 나는 출산을 2달 남겨두고 집을 나갔다. 배가 불러 뒤뚱이던 그때, 갈 곳은 친정밖에 없었다. 친정에 가면서, 나는 또 한 번 검증받지 못한 결과를 만든 내 자신을 미워하고, 혐오했다. 그런 모습에 엄마, 아빠가 또 울었다.

아이 출산하던 날 남편을 다시 만났고, 그는 앞으로는 더 잘 살아보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따로 떨어져 있는 동안 혼자 많은 생각과 상상 속에 남편에게 더 많은 죄를 씌우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너는 그것도 모르고 그래?’라면서. 조리원에서 나온 뒤로도 아이와 계속 친정에 살며 친정집 초인종을 누르던 남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첫아이 100일 될 때까지 남편 없이 나 혼자 아기를 돌보며, 30년의 인생을 살며 처음으로, 무참히 실패했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머릿속에 넣고 넣었다.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나왔다. 1시간에 1번씩, 갑자기, 틈만 나면 울었다. 임신할 때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게 아이한테도 영향이 있었는지, 아이는 기질이 예민해 돌보며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된 게 전부 내 탓인 것 같았다.

그렇게 밤마다 베개를 적시며 지내다 아이가 백일이 되었을 때, 나는 큰 결심을 했다. 다시 잘 살아보기로.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 나는 아이를 위해, 그리고 앞으로의 내 인생을 위해. 시험을 포기해도 좋으니 남편이 전처럼 성실하게 직장만 다녀주길 바랐다. 남편과 나, 아이 셋이서 백일상을 차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다시 잘 살아보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이 얼마 안 되어 큰 선물을 줬다. 남편이 그동안 준비하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첫 시험이었고, 경쟁률이 거의 10대1이어서 남편도 나도 기대를 전혀 안 했는데 드디어 내가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날은 기뻐 어린아이처럼 점프를 100번 넘게 했다.

이렇게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그 이후로도 가끔씩, 심하게 힘들었다. 남편과 육아, 집안일 등으로 갈등이 있는 날이면 끝도 없이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자꾸 혼자 가슴을 치고 울던 예전의 일이 생각났다. 남편을 미워했던 마음이 다시 살아나 남편을 향해 가시 돋힌 말을 내뱉고 눈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은 퉁퉁 부운 얼굴이 창피해 직장 동료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왜 나만 이렇게 힘이 든 거지? 다른 사람들은 다들 행복해보이는데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한거지? 난 열심히 살았는데 결과가 왜 이 모양인거지? 비논리 비교도 시작됐다. 태어나서부터 엄마 껌딱지였던, 예민한 첫째를 재우고 달래기가 점점 힘에 부쳤다. 7살이 되어서도 엄마가 없으면 많이 울어 남편에게 딸을 맡기고 외출을 하는 게 힘들었다. 딸은 우리가 싸운 다음 날, 3살 크리스마스날부터 7살이 되던 해까지 자꾸 오줌이 마렵다고 했다. 계속 쉬가 마렵다고 울어 외출하기가 힘들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심리적 요인으로 인한 것이라 했다. 딸이 힘든 게 또 나 때문인 것 같아 괴로웠다.

더 잘 살아보려 계획해서 둘째도 낳고 대출을 많이 받아 집도 장만했다. 그러면 더 행복해야 하는데 나는 가끔씩, 주기적으로 깊이 우울했다. 노력하는 데 상황이 나아지는 것 같지 않을 때 나는 더 깊게 가라앉았다. 둘째를 낳고 나서 상태는 더 안 좋아졌다. 가족들이 내 눈빛이 이상하다며 병원에 가보라고 했고, 그런 말 한 마디에 눈물이 계속 났다. 몸은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고 하루종일 잠만 자고 싶었다. 남편도 점점 지쳐갔다.


다시 우울해질까봐 이제까지 기억들을 애써 지우려 했다. 과거의 나를 기억에서 꺼내고 있는 지금, 마음이 그리 힘들지 않아 다행이다. 내가 그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구나. 많이 힘들었구나. 위로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와 그 순간을 함께 견뎌준 남편과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막상 지나고 보니 시련까진 아니었는데 내가 왜 그리 심각했는지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욕심이 많던 난 누구보다 잘 살고 싶어 그랬나보다. 열심히 살면 나에게 힘든 일이 하나도 안 생길 줄 알았나 보다. 나만 힘든 게 아닌데 나만 불쌍하다고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가엾어했다. 그때의 나는 아직 많이 어렸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유난히 약해서 무너진 게 아니었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살고 싶었고, 그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정작 나를 돌보는 데 소홀히 했다는 걸. 열심히 살면 불행은 피해 갈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제대로 선택하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흔들리면, 그런 선택을 한 나를 먼저 벌주었던 거다.

또 부모님을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 데 집중하고 정작 나를 인정하는 데에는 인색했다. 우린 누구에게 잘 살고 있는지 증명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닌데 말이다.

잘 살고 싶은 마음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그때의 어린 나도 전부 안아주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젠 안 그래도 돼. 흔들려도 괜찮고 조금 못 살아도 괜찮아.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는 한, 그걸로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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