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요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해.” “다은님이 죄송할 게 아니에요.” 제가 지인들과 대화할 때면 자주 들었던 말입니다. 가족, 친구,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까지. 어릴 때부터 저와 교류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자주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한 번은 전화 상담원분께 “실례지만, 죄송하지만” 이런 말을 계속해서 상담원분이 당황하신 적도 있었어요. 나이가 30대 중반이 넘어가며 해야 할 일과 책임이 꽤 늘었을 때, 곁가지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왜 자꾸 죄송하다고 말하지? 눈치 볼 상황이 아닌데 왜 상대방 눈치를 보는 거지? 왜 나보다 상대방 기분이 우선이지?’
결혼하고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전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남편이 어떤 문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거나 질문을 할 때 남편의 표정과 말투를 살피고, 조금이라도 언짢은 것 같으면 “화났어? 기분 나빴어?”라는 말과 함께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저 자신을 미워했어요. ‘왜 그러는 거야. 당당해져. 너도 기분 나쁘잖아.’ 하고 속으로만 앓고요. 문제는 답답했던 게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남편도 자꾸 제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불편해하고 속상해했어요. 자신의 의도가 자꾸 왜곡되는 것 같다면서요. 같은 문제로 갈등이 반복되자 관련 책, 영상 등을 찾아보니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또 저와 같은 행동 패턴이 어린 시절 특정 경험으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노란 눈에 먹지 않아도 배가 볼록했고 토도 자주 했던 저는 7살에 선천적 담관폐쇄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이듬해 수술을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입원하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았고 수술과 회복으로 남들처럼 3월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저 밑에 어린 동생이 둘이나 있고 병원비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저의 건강만을 생각하며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저는 남들보다 좀 더 일찍 성숙했던 것 같아요. 당시 전 (기억이 잘 안나지만) 병원비를 많이 써 미안하다는 말을 부모님께 많이 하고 증상이 있는데도 아프다는 이야기를 잘 안 했대요. 그 당시 8살의 어린 나의 마음을 38살인 지금의 내가 들여다본다면 부모님에게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가득한데 방법을 몰라 그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또 부모님의 걱정스런 눈빛과 말투를 계속해서 살피는 작고 어린 나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학창 시절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압박 주지 않았는데도 걱정 끼쳐드리기 싫어 스트레스받으며 열심히 공부도 했고, 친구들과 지낼 때도 내 욕구보다는 그들의 말과 표정이 우선이었습니다. 처음 직장인이 되었을 때 진상 민원인의 전화를 새벽까지 받으면서도 싫은 소리 하나 못하던 나의 모습도 조금은 이해가 됐어요.
하루는 남편하고 저하고 식탁에 마주 앉아 MBTI 검사를 해보았습니다. 남편하고 저는 E/I부터 J/P까지 4영역 모두 반대의 성향이더군요. 꼼꼼하고 계획적인 남편은 어떤 결정을 할 때 상대방과 많은 것을 의논하고 궁금한 것은 묻고 확인하는 스타일이었어요. 반면에 전 내키는 대로 결정할 때가 많고 논쟁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상대방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고 그들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저의 행동은 어린 시절 경험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제 성향 자체에도 원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타인과 갈등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아 사전에 타인의 반응과 욕구를 살피는 것. 생산적인 갈등일지라도 내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갈등 자체를 피해 보려는 것. 그래서 남편이 다소 심각하게, 길게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전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나, 남편 마음에 안 드나.’ 이런 생각이 먼저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남편의 순수한 의도였던 말, 표정마저 곡해했던 건 아닐까 싶네요.
여덟 살 버릇이 서른여덟 살 된 지금까지 완전히 고쳐지진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모습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과거의 나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지금은 많이 발전한 상태에 와 있다고 생각해요. 남편의 질문들도, 직장 상사의 찡그린 표정도 ‘나의 탓이 아닐 수도 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내가 잘못 했다면 그들이 먼저 나에게 말해줄 거야.’라고 여기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덧붙여, ‘죄송해요.’라는 말도 조금씩 줄여나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