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내가 좋아진 첫날

전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요

by 다은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몸 구석구석이 쑤셨습니다. 피곤해서 그런가 하고 잠을 오래 자도 수십 번씩 하품이 쏟아졌습니다.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며 울분을 토해내는 날들이 점점 늘어나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아이조차 한순간 버거운 짐처럼 느껴질 만큼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그날도 남편의 행동이 내 맘 같지 않아 뾰족하게 내뱉었던 말이 남편을 화나게 했고, 결국 우리는 또 싸우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계속된 언쟁에 불안해질 대로 불안해진 큰 아이의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걸 보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터져 나오는 나의 분노는 나를 괴물로 만들어 남편을 삼켜버렸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딸에게까지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딸은 울다 지쳐 목이 쉰 채로 잠이 들었고 남편은 문을 닫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작은 방에 이불을 펴 가엾은 딸을 뉘이고 나도 그 옆에 아무렇게나 누워버렸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을 것처럼 펑펑 흘러내렸습니다. 눈물 속 가만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고운 얼굴을 보니 눈물은 어느새 꺽꺽거리는 울음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뱃속에 있는 둘째를 생각해서라도 진정해야 하는데 진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꾸 나쁜 생각만 들었습니다. 이런 나 자신이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엄마한테 연락하고 싶지만 더 이상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 통화버튼은 누르지 못했습니다. 맞은 적도 없는데 가슴 한쪽이 찌그러질 듯이 아프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누워있을 수가 없어 잠옷 차림으로 점퍼와 차 키를 챙겨 밖으로 나갔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던 무지개 해안도로에 가볼까 하는 생각에 바다 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평소엔 빨주노초 아름다운 곳이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추운 겨울밤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그곳이 왜 하필 그때 떠올랐는지 저도 알 수 없었습니다. 도착하니 자정을 넘긴 겨울 바다의 파도가 날 집어삼킬 것 같아 무서웠습니다. 고민하다 차에서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다시 시동을 걸었습니다. 차로 20분 거리에 사는 동생이 보고 싶었습니다. 나랑 출산예정일이 한 달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막달 임산부 동생에게 평일 자정 넘어 찾아간다는 건 굉장히 무례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동생을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동생 집으로 향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계속 머뭇거려 고민하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언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동생의 걱정 가득한 첫 마디에 나는 대답 대신 다시 꺽꺽 울기 시작했고, 동생 부부는 그런 나를 거리낌 없이 집으로 초대해주었습니다. 그날 밤, 쭈뼛쭈뼛 그들에게 미안했지만 내 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며 다독여주는 동생과 제부가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그날 제가 앉아 울던 회색 소파, 동생 집 거실의 온기, 잠자리 안경 너머로 보이는 동생이 흘린 커다란 눈물방울, 며칠이고 자고 가라던 진심 어린 제부의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후, 전 다시 내 집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아직 자다가 엄마를 찾는 3살 우리 딸이 걱정되어서요. 집에 돌아와 보니 다행히 딸은 깨지 않고 잘 잤던 것 같았어요. 딸의 조그맣고 따뜻한 손을 살며시 잡고 ‘일단 자고 내일 아침 다시 생각하자.’라며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나처럼 눈이 퉁퉁 부어있는 딸에게 아침 인사를 하기가 미안했습니다. 모녀가 펑펑 운 걸 어린이집 선생님들께 들킬까 봐 아이 등원시키는 시간도 늦추며 냉동실에 두었던 숟가락만 내 눈에, 아이 눈에 애꿎게 눌러댔습니다. 몸이 산산조각 찢겨 나간 것처럼 아파 평소처럼 아이를 안아서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지 못했습니다.

불안에 가득한 표정으로 가슴 아픈 울음을 내며 등원하는 딸을 보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방법을 찾아보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며칠 전 차를 타고 가다가 ‘부부 상담’이라는 플래카드를 본 기억이 났습니다. 전화번호도, 주최기관도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맘카페를 몇 시간이고 막 뒤졌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보이는 전화번호마다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도와주세요. 상담받고 싶어요. 제가 많이 힘들어요.”

그로부터 2개월쯤 뒤, 저는 남편과 함께 부부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우리 엄마 또래로 보이는, 안경 너머 인상이 부드러우신 상담 선생님께 깊숙이 담아두어 내 마음인 줄 몰랐던 것들까지 전부 털어놓았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상담 선생님을 만나는 초반에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답답해 보였을 텐데도 상담 선생님은 대학 시절 심리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우리 부부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해주시고 조언해주셨습니다. 그런 상담 선생님의 모습에 저도 점점 제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시작했고, 남편 또한 상담에서 부부관계 개선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상담을 받고 2개월쯤 되었을 때, 상담 선생님께서 걱정 어린 얼굴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은 선생님, 지난주 했던 검사 결과까지 토대로 말씀드리는 건데 선생님께서는 정신건강의학과를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병원에 도움을 꼭 받으셔야 해요. 제가 도움 드리는 걸로는 부족해요. 이 수치로는 우울증이 의심되어요.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이니 마음의 감기약도 꼭 처방받아 드셔야 해요. 정신과 약이 내성이 있어 끊기 힘들다는 주변 이야기에 너무 괘념치 마세요. 약은 의사 선생님의 처방 아래 서서히 끊어갈 수 있어요. 선생님, 나를 믿어야 해요.” 순간 머리가 띵 했습니다. 내가 우울증이라니.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상담 선생님의 진심 가득한 조언에, 그리고 조금이라도 나아질 나를 위해 한 번쯤 병원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어느 정신과를 가야 할지 고민이 되어 상담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지만, 상담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정신과 2곳을 포함하여 제 주변의 정신과들은 모두 예약이 1개월, 많게는 3개월 이상 밀려있었습니다. 또 맘카페를 열심히 뒤졌습니다. 병원에 한 번쯤 가볼까 했던 마음이 최대한 빨리 진료받을 수 있는 곳을 찾는 절실함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집에서는 좀 멀었지만, 당일 예약 접수를 하는 곳이 있었고, 직장에 반가를 쓰고 점심시간 끝나는 시간에 맞춰 급하게 병원을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일찍 온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병원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고, 1시간 많게는 2시간까지도 기다려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이 무척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며칠을 망설이다 겨우 찾아온 자리였기에, 차례를 기다리는 1분 1분이 길게 느껴지고 두려웠습니다. ‘혹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온 것처럼 나를 해치면 어떻게 하지. 알고 보니 내가 중증 우울증이어서 입원하면 어떡하지. 의사 선생님이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왜 왔냐고 하면 어쩌지.’ 하고요. 하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다양해 보였지만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진료 전 검사지를 여러 개 할 때도 마음이 그렇게 힘들지 않고 덤덤했습니다.

가장 걱정이었던 의사 선생님과의 만남은 의사 선생님의 첫 마디에 긴장이 와르르 풀렸습니다. “많이 힘드셨죠? 어떤 게 제일 힘들었어요?” 의사 선생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울보인 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또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이 울음은 남편과 싸운 뒤 잠든 아이를 보며 터지던 울음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울면 울수록 마음속에서 응어리져, 얹혀있던 두껍고 무거운 무언가가 조금씩 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에 동생을 찾아갔던 밤,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첫 진료가 끝나고 ‘항우울제’, ‘항불안제’ 등이 써진 약 봉투를 들고 저는 근처 코인노래방을 찾았습니다. 코인노래방은 한창 유행하던 10년 전, 육지에서 대학 다닐 때 갔던 게 전부라 핸드폰 내비게이션 검색하며 위치를 찾아갔습니다. 평일 대낮에 회사원 정장 복장의 30대 여성 혼자 코인노래방에 가서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른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료받고 나니 그냥 혼자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크게 부르고 싶었습니다. 노래를 하면서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다 쏟아내고 싶었습니다. 먼저,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래된 노래 ‘뮤지컬’을 목청껏 부르며 또 울었습니다. 2절은 울다가 거의 부르지 못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내가 돼야만 해.’ 이 소절을 눈으로, 목소리로, 몸짓으로 세상에 쏟아냈습니다. 난 다시 내 삶을 찾을 거라고,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다짐하면서요. 이때도 내 마음을 짓누르던 오래되고 무거운 무언가가 스르르 사라진 느낌이 들었어요.

전 앞으로도 이날을 잊지 못할 겁니다. 이날은 제가 좋아진 첫날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하루하루가 힘들고 막막했던 저에게 스스로 ‘해보자. 다시 좋아져 보자.’ 다짐한 날이니까요. 그날부터 나는 아주 조금씩 조금씩 좋아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가끔은 전보다 더 나빠지는 내 모습을 보며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나는 다시 좋아지려고 또 다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내 삶은 천천히 다른 색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여 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2025년 겨울, 당시 뱃속에 있던 둘째가 세상 귀여운 다섯 살이 되어 나를 웃게 해주고, 불안이 심해 배뇨장애까지 왔던 첫째 딸 아이가 근 한 달 안에 피아노 콩쿠르를 자진해서 두 번이나 나갔습니다. 출근 전 5분을 아껴 못다 한 집안일을 대신해 주는 다정한 남편도 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지금 저로 인해 행복합니다. 좋아지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제가 참 마음에 듭니다. 저는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점점 더 좋아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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