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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엽 Mar 20. 2023

침묵을 위한 증명 혹은

기록집

침묵을 위한 증명 혹은     


침묵을 배운다. 일찍 자고 일어나 아침과 부딪고, 까치발 들고 현관 앞에 설치된 올무를 피해 저마다 봄으로 여름으로 향하는 것이다. 싱그러운 향이 넘실대는 세상을 산책하는 비둘기와 개들과 나. 버니걸 복장으로 오들오들 떠는 부적응자들과 패딩을 두른 이방인들은 침묵하고 서로를 응시한다. 서로를 보는 행위로 이해를 마치다니 참으로 편리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사과 하나로 건강을 염원하는 일처럼 침묵으로 완성되고 마는 것들을 마주하면 여전히 마음이 편치가 않다. 속된 말로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가 아니꼬워서 속이 뒤집힐 지경이다. 그런데도 난 수치스러움을 마다치 않고 침묵을 배우려는 것이다. 고장 난 개수대처럼 열정이 넘치기 전에 비우며, 마음이 부풀지도 쪼그라들지도 않게 부단히 애쓴다. 침묵이 나를 삼키는지 내가 삼키는지 알 수 없는 술래잡기가 이어진다.   

  

침묵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그간 모든 침묵이 이익을 위한 도덕적 해이라고 믿어왔는데, 최근엔 표면적으로 이해하고 모욕해왔다는 걸 알게 됐다. 침묵하는 것이 죄악이라 말하던 처지로 감내할 수 있는 배덕함을 아득히 넘었음에도, 죗값이라 여기며 꾸역꾸역 참아내고 있다. 때때로 발라당 드러누워서 배를 내밀고 헥헥대며 복종하기도 한다. 한데 며칠 전 도무지 해갈되지 않는 의문 하나 생겨난 것이 아닌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히 아는 이에게 가면을 쓰고 적당한 감정을 건네는 게 과연 예의를 갖추는 걸까? 이걸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무례함으로 봐도 좋을까?> 만약 이 가정이 맞는다면, 혹은 과반수가 위화감 넘치는 행위를 보편적인 사회화라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뭇 학자들의 말대로 시뮬레이션 속에 시뮬라크르일 뿐이 아닌가.    

 

인과가 어찌 되었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침묵으로 증명되는 이득을 위해 자신이 인지하는 것이 가짜이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는 틀렸다는 것이다. 다만 미친 사람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모두가 틀렸을 수 있다!>라는 가설을 내세운다고 한들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강제되는 헤게모니는 급진적이지 않은 모든 이념에 야만의 탈을 씌웠고, 새로운 형태의 분쟁으로 현상을 유지하려 한다.     


소모적인 의문 몇 개가 머릿속을 해대더니 이내 두통이 밀려들었다. 나의 침묵은 아직은 이 정도로 하찮은 끈기를 가졌을 뿐이다. 게다가 침묵을 배우면서 대상을 향해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고 극으로 변환하여 의중을 숨기려는 것일 테다. 그러지 않고서야 시대착오적인 글과 그림, 영화 따위를 보러오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이렇게 퇴화와 진화를 반복하여 사랑도 증오도 다수의 기호에 맞는 것으로 보편화되면, 우리가 먹는 지렁이 모양 젤리는 머잖아 진짜 지렁이가 되지 않을까.     


개개인의 인지가 흐려진 현대에서 찰나의 순간을 기록하는 일에 더는 원대한 소명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80억의 사상가로 남아 분열하는 것으로 평화를 지향해야 하는 역설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 간곡히 부탁 하나 하는데 부디 침묵을 종용하는 이들을 증오하지 말라. 동시에 열렬한 행동가에게 찬동하여 자신을 잃지도 말라. <시대착오적인 이념 분리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독점하지 못하게 존재하는 것> 침묵의 용도는 이처럼 역감시자로서 존재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함구하지 않는 행위 자체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거기에 아니라고 소리칠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린 것들이 낯설다면, 기꺼이 기록하고 마음에도 없는 행동들로 능숙하게 대처하는 자신을 마주 보며 온전히 불행을 느껴라. 그게 살아있다는 유일한 징표이다. 나는 감히 현시대의 사랑은 이미 멸종되었노라 하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그대의 사변에 사랑이 메말랐음을 느끼는 까닭이 핸드크림을 챙겨 바르지 않아서는 아닐 것이다. 절대다수는 사랑을 잊었고, 동경하다가 증오하고 변질시켜 그게 무언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극소수가 사랑의 실재를 외치는 것으로 더는 사랑을 표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좌절에도 꼬리를 흔드는 꼴이 한심해서 단미 할 요량이었으나, 현재를 부정할 미래의 나를 위해 왜곡 없는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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