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있어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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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와 B는 볕 드는 창가에 앉았다.
창밖은 반쪽짜리 하늘과 풍경이랄 것도 없는 빌딩 숲이 전부다.>
A: 평소처럼 메모하고 말까 싶었는데 여기저기 되게 꿀팁이다 싶어서요.
B: 저 무신론자예요.
A: 무슨 농담이 그래요. 저도 무교에요.
B: 센스없네.
A: 근데 신은 있을 거 같지 않아요? 심즈 게임처럼.
B: 뭐야.
A: 저는 무신론자는 아니고 무교인 거예요.
B: 알겠어요.
A: 그러니까. 그림이나 글이나 거기서 더 확대해서 삶도. 자신이 보고 감각 하는 걸 표현하는 게 정말 중요한 거 같아요. 화가들이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의 사이에서 왜곡하면서 자신이 느끼는 걸 전하려고 그러는 거처럼.
B: 기표니 기의니 예술 오타쿠 같은 말 하려거든 때려치워요. 안 그래도 죽겠어요.
A: 그런 얘기 아니니까 들어봐요. 그동안에 되게 많이 들은 말인데 어젯밤에 갑자기 확 이해가 되는 거 있죠. 불교에선 이걸 돈오했다고 그러던데. 최근에는 디지털 오염이니 마약 문제니 해서 지난 시대에 경험했던 상실감이 일반화되다가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풍토가 있잖아요.
B: 네네.
A: 암튼 자극적인 것들 때문에 개인의 감각이 온전치 못한 거 같고.
B: 음, 그런가.
A: 그래서 명백히 내 것이 아닌 인지 범위 밖에 있는걸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상대를 경계하고. 사실 경계하면서 그런 부분만 이해하려는 이유도 모르겠는데...
B: 혼잣말하지 말고요.
A: 아... 아무튼. SNS나 유튜브 상위에 오른 공감 많이 받은 다수의 의견이나, 대중 매체에 나온 통계치가 적히지 않고 보도되는 사건들. 이건 다 편향된 자료에 다수의 의견이지 사회를 대변하는 게 아니잖아요.
B: 그렇죠.
A: 근데 다들 그걸 까먹는 거 같아요.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자신들의 기준을 공고히 하는 작업이라고 해야 하나. 이게 고집이나 신념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자신이 기준이 못 미더워서 그러는 거 같거든요. 쉽게 위안받거나 동조하는 무리에 속할 수 있고요. 이건 어찌 보면 빠르고 안전한 자기 고립인데, 한때 말 많던 에코 체임버 속에서 다원화된 형태로 봐야 한달까요.
B: 그러네요. 그런 말 요즘 쏙 들어갔네.
A: 그쵸? 편향된 소수 집단에 여러 개 속해서 어느 소속도 아니면 결국 손가락질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암튼 정보 취급이 쉬워지면 앞으로도 더욱 다원화될 텐데, 그럼 체임버랑 체임버를 비교하며 표준값을 내던 때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제 말은.
B: 음, 형태적으로 와 닿지는 않는데 대강 의미는 알겠어요.
A. 네네, 그거면 충분해요. 예를 들어 보자면 아무리 반윤리적인 사상이라도 전쟁 범죄자나 급진적인 논리들에서 하나씩 주워오기 시작해서 완성 시키면, 그리고 그걸 다수가 동의하면 맞는 말처럼 보인다는 거죠. 조금 과격한 비유긴 하지만요. 거기에 여러 사람이 의견을 동조하는 듯 예시를 늘어놓으면 중립인 집단에 혼란을 줄 수 있고 자신들의 사상을 피력할 수 있고요. 최근에 사이비종교들이 카톨릭도 별반 다를 거 없다며 사상전복을 시도하는데, 멀리서 보면 정말 이상한 논리라고 느끼잖아요? 근데 그 사람들은 계속하면 그게 되리라 믿는 거예요.
B: 똑똑하다고 봐야 하려나.
A: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종교적 증명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허점을 숨기고 동급으로 인식되려고 하는 거니까. 뻔뻔한 거라고 보는 게 맞지만 똑똑한 거죠.
B: 그래서 하고 싶은 게 기존 종교랑 사이비종교 얘기에요?
A: 아니에요. 저 무교라니까요.
B: 흠.
<B는 A의 손목에 묵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A: 아, 이 묵주는 선물 받은 거예요.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가끔 차는데, 아마 안 믿으시겠지만.
B: 알겠어요. 얘기 길어질 거 같은데 우선 이거 받아요.
<B가 꾀죄죄한 에코백에서 3호짜리 액자를 꺼내 건넨다.>
A: 이게 뭐예요?
B: 본인이에요. 저번에 그렸는데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A: 너무 놀라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우선 고마워요.
B: 의미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데, 긴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리게 됐어요.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리지 말까 하다가 의식적으로 안 그리자니 고립되어서 얻어지는 게 무언가 싶고?
A: 멋지네요.
B: 그래요? 다행이네.
A: 고마워요.
B: 그래요, 얘기나 계속해봐요. 사이비 종교얘기.
A: 최근 살인마 잭의 집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B: 으, 엄청 잔인한 거 아니에요?
A: 보셨어요?
B: 싫어요 그런 거. 차라리 슬래셔 영화면 통쾌하기라도 하지.
A: 별나기도 하시네... 주인공이 잭이라는 연쇄살인마인데 자신의 살인을 예술가들의 행위나 히틀러, 무솔리니 같은 전쟁광들에 빗대어 합리화하는 장면이 길게 나와요. 영화를 이루는 전반이 그런 내용이라도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죠.
B: 듣기만 했는데 벌써 싫다.
A: 맞아요, 영화 평가도 엄청 안 좋은데, 저는 그런 싫은 장면을 길게 나열하면서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게 뭔가 궁금했어요.
B: 재밌었어요?
A: 아뇨, 참은 거죠 무슨 얘기를 하나 하고.
B: 그래서 뭔데요.
A: 잭이 나쁜 사람이고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이니 벌을 받는다는 기존의 권선징악이라는 구태의연한 서사구조가 아니라 다원화되어 무슨 악행도 이유를 거들먹거리다가 일부분에서는 “어? 그게 맞나?”,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사회가 연상됐어요.
B: 그래서 잔인한 장면들이 꼭 필요했다?
A: 그렇죠. 불쾌할 정도로 잔인한 장면들을 나열해서 살인을 현대의 심리학으로 관념화해서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더 오래전 만들어진 관념과 대립하고,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는 잔혹한 행동에 예술품이 갖는 미학도 결부시키고요.
B: 끔찍하네.
A: 그렇다고 지옥에 떨어져 무조건 벌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에요. 더 괜찮은 지옥에서 지낼 수도 있고, 지옥에서 도망칠 가능성도 있고요. 그리고 지옥이 우리가 생각하는 커다랗고 체계화된 곳도 아니에요.
B: 그건 좀 재밌네요.
A: 인류에게 수천 년간 굳어진 살인은 나쁘다는 통념에 의문을 던지고.
B: 그게 연쇄 살인이다? 말은 되네요. 싫지만.
A: 맞아요. 그런데 그걸 파훼하는 과정은 명료해요. 결국, 악은 악이고 그들의 선택도 악독하기 짝이 없다는 거죠.
B: 맞지. 감독은 그걸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A: 네, 에코 파시스트들이 하는 과격 행동처럼, 모두가 경악할만한 시위를 해야 소수의 의견을 봐준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거 같아요. 여기에 연결되는 말인데 최근에 진격의 거인이라는 애니메이션 봤는데 말이죠.
B: 그거 안 본다면서요.
A: 네, 한국인으로서 너무 싫은 주제고 어떤 의도가 있는지도 알 거 같아서 보기 싫었는데, 살인마 잭의 집을 보고 나니까 봐야 할 거 같았어요. 언젠가 봐야 할 거라면 지금 봐야지 싶어서.
B: 어땠어요?
A: 인기 많은 이유도 알 거 같고. 북미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이유도 알 거 같아요. 말초적인 것들이 갖는 힘을 제가 지나치게 간과한 거 같기도 하고요.
B: 결국 재미는 있다는 말이네요.
A: 그쵸. 앞서 말한 거처럼 다원화된 관념들을 열거하고 전쟁에 관한 담론을 하고. 그런데 이건 살인마 잭의 집보다 과격하게 느껴져요. 자신이 전범 국가의 국민으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혹은 조심스러워야 하는 문제까지도 “살기 위해서면 어쩔 수 없지 않아?”라는 식의 폭력적인 논담을 쉴 새 없이 하거든요.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하나의 인간으로선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있다고 하는 것과는 너무 달라요.
B: 민감한 부분이지 그거.
A: 근데 진격의 거인은 살인마 잭의 집처럼 예술영화에서 종종 채택하는 관객의 불쾌함을 예측하고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한 게 아니라, 작가의 의견이나 역사관 거기에 따르는 객관적이지 않은 지표들을 너무 결부시켰어요. 이건 오락용 영상 매체가 틀림없는데, 관람층이나 추이로 봐도 대중문화를 표방한 것이거든요. 저는 이렇게 우스갯소리처럼 유야무야 무거운 주제를 섞어 내는 걸 싫어하는데, 진격의 거인이 딱 그랬어요.
B: 그게 여전히 많은 작가들이 작품과 국가 선전을 헷갈리는 이유겠죠. 근데 그들도 서양 문물을 찬양하면 언제 적 탈아입구냐고 욕먹고 일본 것들 알리면 국가 선전물이라고 하고 피해국 입장 대변하면 자국에서 매국노 취급받으니까 정도를 지키기 어려운거죠.
A: 그렇죠.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싶었어요. 많은 일본 작가가 핵폭탄을 쏘지 않는 행위 자체만 평화로 여기면서 피해자라고 자칭하는데, 아... 스포가 될까 봐 자세히 말은 못 하겠네요.
B: 그냥 해요. 난 안 볼 거야.
A: 그래요? 진격의 거인에서 주인공이 지나라시(じならし) 그러니까 한국 말로는 땅고르기라고 직역해야 할까. 아무튼 농사에 관련된 카테고리에 있는 언어로 쓰이는 거 같은데, 지구 인류 몰살을 새로운 터전을 일구기 위한 땅 고르기라고 명명해요. 모국인 섬나라 빼고 멸망을 시키려고 하거든요.
B: 섬? 좀 께름칙하네.
A: 그래서 얘기가 많았던 거 같은데 중요한 건 그런 직접적인 수사들이 아니고 여러 묘한 뉘앙스를 재미로 덮어 버리는 거 같아요. 지나라시를 땅울림이라고 번역하는 걸 보면, 한국 번역가들도 아는 거겠죠. 그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거기에서 이어지는 과거의 사상이 무엇인지 말이에요.
B: 그렇다고 버리기엔 너무 큰 수익이겠죠. 엄청나게 흥행했고.
A: 그렇겠죠. 소신있게 말하면 정치적인 의견처럼 보일 거 같아서 꺼려지는데, 만약 전쟁에 관련한 논담을 하고 평화에 관련한 정의를 내리려거든 적극적으로 현대의 일본인이 과거와는 다르다를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주인공 친구들은 주인공이 인류를 멸망시키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대화를 해보면 되지 않을까. 자신을 죽이려 쳐들어온 놈들한테 너희도 어쩔 수 없었구나 같은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을 하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적국도 아닌 모든 지구상 인류를 멸망시키는데 거기에 나름의 명분이 있다고 믿는 거예요. 운명적이고 누군가 나를 막아줬으면 하는 거예요.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서 말이죠. 저는 이 만화를 소년 성장물 장르가 아니라 피카레스크로 분류해야 할 거 같아요. 저마다 평화를 말하는데 결국엔 모든 등장인물이 악인이거든요.
B: 맞네, 악인. 일본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위기의식의 뿌리가 무척 깊어요.
A: 그것도 알아요. 그런데 이게 만화 속 인물의 생각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너무 명확하게 실재하는 과거 역사를 떠올리게 만들어요. 과거라 불리기에도 무색한 현대사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전쟁과 침략에 관한 문제를 다룰 정도로 시간은 흘렀다고 생각하거든요.
B: 그 만화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걸 합리화 하려는 거 같다는 거죠?
A: 만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우기면 아니겠죠. 그런데 하야오의 만화와 다르게 그걸 자국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불편한 게 아니라 너무 명확하게 전쟁과 관련한 전반적인 의식을 다루고, 일정 부분 합리화 시도를 하기도 하고요. 아직 마지막 편은 보지 못했는데, 여기서 주인공을 천하의 쓰레기로 만들거나 지난 세월 동안 양측의 모든 사상이 잘못되었다고 번복하는 게 아니면 저는 그렇게 판단하는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B: 음 그런데도 인기가 그렇게 많다니.
A: 다수가 인정하는 게 대중문화의 정의니까 이런 말 하는 것도 참 시간 낭비고 어려운 문제이기도 한데 말이죠.
B: 그러게, 참 어려운 문제다 이건.
A: 저는 무라카미 다카시가 평면성을 강조하며 일본 현대 미술의 모순을 파훼한 거처럼, 일본 작가들이 과거와 현재를 이을 수 없어 평탄화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땅까지 평탄화 하면서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거죠. 이런 측면에서 멘발의 겐은 칭찬받아 마땅한데, 골조 자체는 진격의 거인과 흡사해도 주인공들이 이를 대하는 태도는 무척 다르거든요. 무언가 강압적으로 투영하려 한다거나 근간도 없는 개똥철학 결부시키며 전쟁을 합리화하려 하지 않아요. 개인으로서 그리고 아이로서 바라보는 같은 시선임에도 너무나 다른 결과로 이어지거든요. 심지어 맨발의 겐에서도 주인공과 주변 인물이 폭력이나 범죄, 죽음에 노출되어있고 원망도 하고 반성도 하는데 완전 다르다는 말이죠.
B: 그 만화책 얘기 정말 많이 하는 거 같에.
A: 진짜 괜찮은 작품이에요.
B: 작품이라.
A: 만화든 뭐든 좋은 가치가 있다면 작품이죠 뭐.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진격의 거인에서 줄곧 이어지는 지나칠 정도로 명료한 메타포가 살인마 잭의 기괴한 살인 행각보다 더 음흉하고 잔인하게 느껴졌어요.
B: 좀 위험한 발언 같은데.
A: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인류의 적인 줄 알았던 거인들의 모습은 엄청나게 희화화되어 보이는데, 조몬 시대부터 이어지는 요괴 삽화들과 비슷해 보여도, 엄청나게 과격하고 강하게 표현되고 있어요. 아예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처럼 말이에요. 자연재해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만, 요괴들은 강하긴 해도 인간이 어찌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미갓 정도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B: 이누야샤?
A: 네, 요괴 관련한 일본 콘텐츠는 대개 작은 신사에 오래 봉인된 요괴니 뭐니 하는 식으로 시작하니까요. 저는 이게 최근 일본이 자주 채용하는 공포에 관련한 수사 방식이 비슷하다고 생각돼요. 텐메이ㆍ텐포 대기근이나 여전히 이어지는 지진,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를 시각화와 동시에 희화화하며 위기를 상쇄하려는 척박한 환경에 처한 이들 특유의 방향성이라고 하면 적당하겠네요.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역시 하루키의 방식이 가장 건전하다고 볼 수 있어요. 데즈카 오사무처럼 전쟁이나 침략 등 위기 극복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미묘하게 표현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삼자의 입장에서 조망하고 전진하려는 의도가 더 강하다는 거죠.
B: 아무래도 시대적 차이가 있으니까요.
A: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성향의 차이가 크겠죠. 바이킹들이 유럽을 침략한 걸 지나치게 진지하게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 야만성과 강한 생명력을 희화화하며 아이코닉한 과거로 여기는 거처럼요.
B: 사무라이나 닌자도 비슷하지 않겠어요?
A: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B: 가만 보면 인간은 잔인한 걸 참 좋아하는 거 같아.
A: 평화의 시대엔 헤비메탈 같은 말초적인 자극을 원하고, 전쟁이 나면 평화를 원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겠죠. 일본은 여느 나라보다 자연재해가 잦고, 스스로 극동아시아라고 부르는 경향이 잦고 극지를 표방하잖아요.
B: 하긴 한국 사람이 극동아시아에 산다고 말하는 건 본적 없는 거 같네요.
A: 그쵸, 예로 이토 준지는 원형 그대로 과거의 표현 방식을 이어간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징그럽고 어이없고 이유도 없는 공포들을 희화화해서 그려내는 게.
B: 그건 괜찮다고 생각해요?
A: 네, 그것들이 마냥 무섭다기보다 가까이 두고 살펴야 한다 여기는 관점에선 건강한 편이죠. 적어도 미화되거나 내포하고 음흉하게 관철하려 한다거나 하지 않으니까요.
B: 갑자기 궁금해서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A: 음, 좋죠. 제가 일본인이었다면 200%는 더 좋아했을 거 같아요. 일본의 마지막 낭만이라고 해야 하나. 환상적인 동화라고 해도 좋겠어요. 최근엔 점점 현실에 닿고 있긴 하지만요. 포뇨가 해일을 은유하는 거처럼. 일본인들 앞에 산재한 공포와 사회적 문제를 정말 아름답게 풀어내는 거 같아요. 한참 유행하던 스즈메의 문단속도 지진과 관련한 내용이라고 들었고.
B: 맞아요.
A: 일본 지식인들은 근래에 일어난 대지진을 무척이나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요. 앞으로 비슷한 규모의 재난이 일어나면 일본이 견딜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거 같더라고요. 전처럼 외부에서 해결을 찾고 극복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니까요. 고령화되어 경제 성장률이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에 뾰족한 방법도 보이지 않고요.
B: 관광 산업은 잘 되잖아요.
A: 그렇죠. 지방 소도시의 신사 중심의 문화나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는 마츠리들도 전부 일본 특유의 매력으로 느껴지잖아요. 음험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고요. 어찌보면 하야오의 작품들이 그런 매력들을 극한으로 뽑아낸 거 같아요. 한국에서는 신사에서 모시는 일종의 잡신에 관련한 문화가 원형을 찾아보기도 어려워요. 무당들이 명맥을 잘 이어왔는지 확인할 길도 없고, 지난 시절의 설화가 식민지 시절에 상당 부분 소실되기도 했고요. 아마 일본의 것과 비슷할 테고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가 일본과 가장 밀접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거죠. 잃어버린 기억 일부를 유추할 수도 있을 테고, 아마 그래서 일본의 문화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 아닐까 싶어요.
B: 재밌는 추리네요.
A: 진격의 거인이 북미에서 인기가 많은 것도 그들이 전쟁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함께했기 때문일 수 있겠고요.
B: 그것도 일리가 있네요. 사이비 종교의 신앙보다는.
A: 하하, 그렇게 보면 그렇죠. 사이비종교의 신학보다는 일본처럼 생활 속에 신이 존재하지만, 때론 이유없는 해를 끼치는 불가해한 대상으로 인식하는 게 건강한 거예요.
B: 이토 준지처럼 말이죠?
A: 네, 어두침침한 면이 있긴 해도 일본 만화에 나오는 신이나 이국적인 풍경이 여행을 가고 싶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고 말이죠. 그런데 너무 관광 선전에 치우친 경향도 많아서 퇴보하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요.
B: 오사카 가서 음식 먹고 하는 그런거요?
A: 네, 모든 영상물에서 그런 내용이 나오는 거 같아요. 정말이지.
B: 일본 음식이 맛있긴 하잖아요.
A: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먹방만 계속 나오면 질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B: 하하, 뭔말인지 알겠다.
A: 테즈카 오사무의 만화 중에 비교적 덜 알려진 도로로라는 만화가 있는데.
B: 토토로?
A: 도로로요. 그건 하야오 작품이잖아요. 전국 시대 영주인 아버지가 주인공을 요괴에게 바쳐서 몸을 빼앗기게 되는데, 죽은 줄 알고 강에 버린 아이가 요괴를 없애며 몸을 되찾는다는 내용이에요. 거기 나오는 요괴들의 상당수는 자연 현상이나 인간의 공포가 만들어낸 허상이거든요. 데즈카 오사무가 이걸 멋지게 잘 표현했어요.
B: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A: 아, 얘기를 하다 보니 완전히 다른 길로 빠졌네요.
B: 세상에. 또.
A: 요는 우리가 갖고 있는 오래도록 보존된 감각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과거 철학자들이 말하는 <정신 건강>하고 지금의 것은 또 다른 거 같아서 이게 더 애매해졌단 말이죠. 논담도 아예 다른 측면에서 살펴봐야 할 거 같고. 3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면 또 다를 거 같기도 하고요.
B: 그 얘기를 하려고 만화 얘기를 그렇게 했구나.
A: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B: 괜찮아요. 재미는 있었으니까.
A: 어쨌든 온전한 감각이 우리를 고독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우울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기도, 죽음을 맞아도 명분이 있게 해준다는 가설이에요.
B: 가설.
A: 네, 가설.
B: 아직 인류애가 있어서 그런가 봐.
A: 그런가 봐요.
B: 나 약 잘 챙겨 먹어요. 행여 걱정되서 그러는 거면...
A: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 조금은 그렇긴 해도. 아무튼요. 성경 공부하자는 것도 아니고, 보험 파는 거 아니고 에세이 써서 펀딩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힘냈으면 좋겠어서.
B: 알아요.
A: 들어줘서 고마워요.
B: 에-이 뭘요.
<시간이 흘러 누런 해가 구겨 놓은 투명한 과자 비닐에 이리저리 반사된다.
둘은 의미없이 눈을 마주치다가 고개를 끄덕하고 창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