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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Jul 13. 2020

잘못된 만남

기대가 무너지면 실망이 찾아온다

아이가 있으면 쉽지 않은 일 중에 하나가 숯불에 고기를 구워 먹는 곳에 가는 것이다. 남편과 나는 연애 중에도 종종 고깃집에서 술과 함께 고기 먹는 것을 즐겼고, 첫째가 조금 자라고 나서도 종종 시간을 내어 고기와 술을 즐겼다. 밤 시간 식당은 담배를 피우는 등 환경이 좋지 못하니 가능하면 낮 시간,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고 어중간한 시간을 틈타 고깃집을 향했다. 이것도 아이가 둘이 되니 쉽지가 않았다. 둘을 달래 가며 고기를 굽고 먹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라서 포기했다. 사람이란 못한다고 생각하면 더 하고 싶어 지는 동물이라 외식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고깃집이 가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아이들이 모두 등원을 하는 평일, 남편이 쉬는 날(한 달에 하루 의무적 리프레쉬 데이가 있다)을 틈타 고기를 먹으러 갔다.


그마저도 막내가 뱃속에 있던 2년 반 전이 마지막이다. 막내를 출산하면서 한 동안 외식을 못했고, 다시 찾아가니 낮시간에는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했다(정식 식사메뉴만 판매한다고 한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찾아온 겨울에는 아이들이 번갈아 감기를 했고 코로나가 찾아왔다. 


늘 아이 중 하나가 함께 한 리프레쉬를 보내다가 마음먹고 오늘은 셋 다 보내 두고(첫째가 학교에 가는 날이다) 가까운 고깃집을 찾았다. 일전에 방문했을 때는 월요일 휴무였는데 바뀌었는지 오늘은 영업을 한다. 2년 반 만에 찾은 고깃집은 무척 맛이 좋았고, 점심 식사 메뉴를 먹는 사람들 틈에서 남편과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고기를 구워 먹으며 반주도 한 잔 했다. 이 자유를 누리는데 2년 반이 걸렸음을 새삼 되새기면서 말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예상하고 기대하며 산다. '내일 쉬는 날이니 모처럼 둘이 오붓하게 데이트를 할까?' 평소에 아이들이 있어서 못 하는 것 중에 무엇을 할지 생각하며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다. 이러다가 막상 당일 아침에 아이 중 하나가 아프거나, 변수가 생기면 그 기대감은 즉시 전투태세로 변환된다. 실망할 겨를조차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할 수 없지 뭐.' '애가 아픈데.' 이렇게 말하고 다시 다음 달 리프레쉬를 기약한다. 그런데 과연 기대가 무너진 그 날,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반 고흐의 귀>를 읽는 중이다. 이 책 하나로 고흐와 고갱, 테오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거기에다 나는 고흐와 고갱, 테오에 대한 사전 정보나 지식도 거의 없는 편이다. 여기에 적힌 이야기가(저자는 최대한 정확한 근거를 대고 있지만) 전부 사실라고 확정 지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아를로 향할 때 고흐의 기대감. 도착하고 한 동안 희망에 부풀었던 고흐의 모습을 보니 귀를 자르는 행동으로 끝나버린 그곳에서의 생활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왜 그는 그곳에서 - 어떤 면에서 정신적으로 아픈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곳에서 더욱 많이 힘든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기간 안에. 


나는 화가 친구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
위대한 꿈을 꾸는 친구, 그의 천성이 그렇기에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듯 그림을 그리는 친구를.
-빈센트 반 고흐가 테오 반 고흐에게.
1888년 8월 18일



고흐는 노란 집에서 함께 지내며 작품 활동을 하고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화가 친구 베르나르와 살기를 바랐다. 에밀 베르나르는 반 고흐를 "너무나도 고생한 인물로 솔직하고 열린 마음을 가져 함께 있으면 활기가 넘치며, 약간의 악의 같은 것도 있지만 재미있고, 좋은 친구이자 거침없는 판단력의 소유자로 모든 이기심과 야심을 버린 사람이었다." 고 말했다. 둘은 서로에게 호의적이었고 떨어져 있었으나 편지로 교류하고 멀리서 함께 작업하는 환경을 만들면서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갱은 여러 차례 베르나르에게 아를로 오기를 청했지만, 불행히도 베르나르는 가족들의 반대로 인해 아를에 갈 수 없었다. 고흐는 함께 작업하고 아이디어를 토론할 누군가와 함께 살기를 바랐다. 1888년 6월, 빚이 쌓여 절박해진 고갱의 사정을 알게 된 테오는 공식적으로 고갱에게 아를에서의 생활을 제안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고갱이 아를에 간 것은 10월 21일이 되어서다.


물론 고갱의 사정과 입장은 잘 모른다. 특히 이 책은 고흐 중심적으로 적힌 책이니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봐야겠지만. 고흐의 편지에 따르면 고갱은 너무도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그를 기다리며 애태우고 신경 쓰는 동안에도 고흐는 그림을 그렸다. 굉장히 열정적으로. 그 시간은 정신적으로 지친 고흐에게 무척이나 가혹한 시기였으리라 짐작된다. 기대에 부풀었다 실망하기를 몇 달 동안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인지.


함께 살면서 이들의 불화는 극심해졌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함께 살기 전부터 고갱은 고흐에게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그렇다고 고흐의 극단적 선택이 고갱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고갱이 지낼 수 있도록 집 안을 준비하느라 들뜬 듯 보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다. 집 안을 채우면서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을 주고 있다는 불안감도 감추지 못한다. 거기에 더해 불안함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달래던 고흐다.  


반 고흐는 1888년 7월 말 지칠 줄 모르고 그림을 그렸고, 그로 인해 기운이 소진되었다. "또다시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중략) 그가 몰두할 때면 광적으로 작업했기에 감정적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었고 육체적으로도 망가진 허약한 상태가 되었다. <반 고흐의 귀> p.302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피폐해지고 정신적으로도 고갈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계속해서 고갱과 함께 살게 될 것인지 그렇지 못할 것인지에 전정 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되지 않은 때에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고립된 듯한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에서 정신적으로 심약한 고흐는 이미 충분히 시달린 상태인 것이다.


고갱이 그린 고흐의 모습



책은 이제 고흐와 고갱이 함께 살던 1888년 10월~ 11월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고갱이 그린 고흐의 모습은 그들의 갈등이 심화된 계기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내가 느끼기로는 갈등의 계기가 되었다기보다는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그림 같다. 훗날 고갱이 이 그림을 본 고흐의 반응을 "나긴 나야, 맞아. 하지만 미친 내 모습이군."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림을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고갱이 고흐를 내려다보는 각도가 그가 고흐를 실제로 어느 정도 깔보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표현이라고도 한다. 시든 꽃을 그리는 술에 취한 것 같은 모습은 충분히 고흐 입장에서는 기분 나빴을 수 있었을 듯하다. 


당신 그렸던 고흐의 자화상은 머리를 깎고 얼굴이 퀭하며 볼이 쏙 들어간 피폐한 모습이긴 하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반 고흐는 자주 언쟁을 벌였고, 변덕을 부렸으며, 점차 같이 살기 힘든 사람이 되어갔다.'라고 하지만 고갱 역시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를 잘 몰라 함께 하긴 했지만 고흐와 함께 살기 이전 파리에서의 고갱도 자주 시비가 붙었던 것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불과 불이 만난 것은 아닐까.


고작 육아하는 일상 속 반나절의 일탈을 꿈꾸는 것도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행여 아이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내일의 계획이 현실이 되지 못할까 조바심이 난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지면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조금 더 짜증이 나기도 하고, 엉뚱한 곳에 불꽃이 튀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심약했던 고흐에게 고갱과 함께 하는 일상까지 가는 길도, 함께하는 시간도 그리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았던 것 같다. 아직 문제의 그 밤(고흐가 귀를 자른 날)까지 이야기가 이어지진 못했지만 몇 가지 가정은 해보게 된다. 몇 장 내내 고흐와 어울리기 힘든 고갱의 성향을 보면서 고갱이 끝까지 아를에 가지 않았거나 하는 선택으로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삶은 조금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두 화가의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듯하여 '잘못된 만남'은 아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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