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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Jul 14. 2020

왜 나한테만 가혹한가요?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반 고흐의 귀>를 이제 절반 정도 읽었다. 반 고흐의 역사적 그날. 귀를 자른 날의 상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앞서 귓불만 잘랐다는 이야기가 꽤나 많이 나와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어 귀 전체를 잘랐다는 증거들도 속속 보였다. 결과적으로 진실이라 추정되는 이야기는 보았지만 결론은 책에서 모두 확인하시는 것으로 하자. 귓 일부인지 귀 전체인지가 사실 뭐 그렇게 중요할까 싶기도 하지만. 칼을 몸에 대는 행위는 상상만 해도 몸이 떨리는데, 거울을 보면서 귀를 자르는 행동을 하는 것이, 그것도 귀 전체를 자르는 게 가능하긴 한 건가 싶기도 하다.


뒤이어 그린 자화상 두 점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게 읽었다. 왜 두 그림에 붕대의 형태나 두께, 청결도가 다른 것인지, 그가 쓰고 있는 모자의 색이 다르게 보이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참 끈질기게 고증하려 노력한다. 성실성과 집요함, 짐작되는 사명감까지 보여 더욱 책에 몰입하게 된다.


출처: yes블로그 ena


읽는 동안 '고흐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과연 축복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처음 그가 걸으려 했던 목사가 되었다면 그의 삶은 바뀔 수 있었을까? 안다. 세상에 만약에 라는 가정은 별 소용없다는 것을. 물론 그랬다면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지도 않았겠지만 불행한 한 사람도 없지 않았을까?


"빈센트는 아직 여기 있다. 하지만, 아, 힘겹게 애는 쓴다만 아무 성과가 없다.... 아, 테오, 빈센트의 그 고통스러운 어둠을 비춰주는 빛줄기가 있다면 좋겠구나." <반 고흐의 귀> p.66


그가 가졌던 문제가 유전적 질환이었는지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질환 가족력이 있었던 흔적은 찾을 수 있다. 그의 아버지 반 고흐 목사에게서 태어난 여섯 명의 자식 중 두 명이 자살했고, 테오의 진단명이 뇌매독이긴 했지만 그를 포함한 두 명이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1880년 그의 가족은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려 했었던 것과 그의 가족의 이후 생애를 보았을 때 1888년 아를에서의 자해사건이 그저 일시적인 이유로 일어난 충동적 행동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해본다.


니체의 삶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자꾸만 '만약에 이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들이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가정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삶이 안타까워서이다. 고흐가 아를에서의 삶이 꿈꾸던 대로 그곳에서 정착하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더라면 그는 일상적인 삶을 사는 평범한(?) 어느 화가가 될 수 있진 않았을까?


물론 세상은 그렇게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너는 불쌍하니까, 너는 안타까워서... 이런 식으로 선의를 베풀고 온정을 나누어주지는 않는다. 처절할 만큼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경쟁해야 한다. 우선은 내가 살아남아야 남도 돌아볼 여유가 있는 것도 맞다. 그럼에도 고흐의 삶은 너무도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동시에 누군가의 삶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되면서 그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나는 니체도 고흐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동정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흐가 귀 치료가 진행된 후 병원에서 외출을 허락받고 처음 간 곳이 그의 노란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장소를 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버거운 일이라 짐작된다. 심지어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고흐에게는 더욱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여전히 벽에는 피가 튄 얼룩이 있었고, 피로 물든 헝겊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으며, 위층의 반 고흐 침대는 상당히 많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반 고흐의 귀> p.516
집 청소와 피 묻은 침구 세탁, 새 붓과 옷 구입, 신발 수선 등의 비용이 열거되어 있다. 반 고흐는 정신발작을 일으켰을 때 옷을 찢고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일까? <반 고흐의 귀> p.536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자신의 보금자리를 다시 마주한 고흐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집을 채우면서 그곳에서의 생활을 꿈꾸던 고흐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피 투성이의 난장판이 된 자신의 공간을 바라봤을 그의 심정은 참담하다는 말로 다 설명이 안될 것 같다. 그나마 곁에 롤랭이 함께 해주어 다행이었다. 

한편 그는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아수라장을 보면서 고갱에게 서운하진 않았을까? (나라면 그랬을 것 같다) 그가 귀가 자르던 순간을 보았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함께 10개월가량을 살았던 사이가 아닌가. 피가 곳곳에 튀어 난장판인 집을 그냥 버려두고 돌아가면서 그는 고흐가 다시 그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것일까? 고흐는 그가 원망스럽진 않았을까? 고갱은 흔적들을 지워두고 정리를 해주는 배려도 할 수 없었던 것일까? 물론, 뒤에 이어진 이야기에 따르면 꽤나 많은 비용이 들어 고갱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혼자 힘으로 어느 정도 치워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사건 이후 그린 고흐의 그림 속에 있는 편지는 동생 테오의 약혼 소식을 전한 편지로 추정된다. 고흐의 입장에서 동생의 약혼 소식은 자신의 꿈(남부의 스튜디오)을 지탱할 수 있는 기반이 흔드는 소식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의 발작에 테오의 약혼 소식도 한 몫했으리라 믿는 눈치다.) 


글의 곳곳에서 고흐는 그림을 그릴 때 꽤나 고통스러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심각하게 절박하게 몰아세우고 극한의 상태에서 예술적 감각을 끌어올리는 유형으로 보인다. 그런 그에게 햇살 좋은 아를은 심신을 안정시키기에 적합한 장소였을 것이다.(물론 겨울은 혹독하지만 말이다) 여러 편지와 작품을 보아도 그는 아를을 많이 마음에 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랬기에 그는 고갱이 떠나도, 테오가 약혼을 해도 계속해서 스튜디오를 이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다음 장은 아를에서 고흐가 추방당하는 스토리가 펼쳐지는 듯하다. 함께 하고팠던 예술가도 떠났고, 지지해주는 동생도 약혼을 하는데, 정착하고 싶어 하는 지역에서마저 내몰릴 위기에 처해진다. 고흐는 모두에게 배척당한 느낌이었을 테고 철저하게 혼자 버려졌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유독 춥고 혹독했던 그 겨울, 지역에서 유일하게 그에게 우호적인 친구 롤랭마저 인사이동으로 떠나버린 후, 혼자 남은 심약한 그는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다. 


고흐는 불안정한 삶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불행히도 여건은 그것들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고흐는 삶의 안정을 찾는데 실패하고 만다. 그의 작품을 알아주는 지인이 있었거나, 함께 작업할 화가가 있었다면. 그의 영혼을 어루만져줄 여인 또는 가족이 함께 했다면. 그것도 아니면 롤랭 가족과 목사라도 가까이서 그를 지탱해 주었다면 생을 그렇게 마감하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림에 문외한이니 고흐의 그림이 얼마나 대단한 그림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그림의 작품성을 떠나 어쩌면 그의 아프고 어려웠던 삶과 짧은 생으로 이어진 스토리가 그의 작품을 더욱 빛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모든 것에 결핍이 아름다운 작품으로 태어났다고 사람들은 보는 것일까? 고흐의 노란색이 아프고 안타까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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