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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Sep 19. 2020

돈으로 시간을 샀습니다.

살림도 장비 빨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 있다. 

"육아는 장비 빨"


광고를 보고 있으면 꼭 있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아이를 키워보면 없어도 되는 육아 템들. 그럼에도 그것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를 소비자가 현옥 되었다는 말로 일축할 수 없는 것은 육아 템들 덕분에 육아가 수월해지는 것을 느꼈다는 경험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이다. 장비 빨이 꼭 육아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최근에 남편에게 식기세척기를 선물 받았다.(아직 설치 전이긴 하지만) 비싼 가격은 차치하더라도 좁은 주방 공간을 비워야 한다는 부담감에 잠시 멈칫했다.


'없어도 잘 살고 있는데...' 


이 글을 읽는 남편은 배신감이 들지 몰라도 이런 생각을 잠시 했다. 곧바로 생각을 바꾸긴 했지만 말이다. 남편은 거의 사용할 일이 없을 값비싼 가전제품의 구매는 가사 노동에서 조금이라도 해방시켜 주고 싶은 남편의 배려라 짐작된다. 더불어 최근 새로운 살림 템들을 사용하면서 느낀 점이 있기에 생각의 전환이 빛보다 빠를 수 있기도 했다.


비워진 공간에 식기세척기가 들어오게 되면 살림 장비가 거의 완벽하게 업그레이드된다. 건조기는 사용한 지 거의 2년이 되어가고 몇 달 전에 구입한 무선 물걸레 청소기도 잘 사용하고 있으니 살림 전반에서 걸쳐 장비 빨을 세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다고 해도 빨래를 분류해서 넣고 꺼내고 개어 넣는 과정은 어차피 사람의 손이 닿아야 한다. 식기세척기를 쓰더라도 넣고 꺼내어 제자리에 수납을 해야 한다. 무선 물걸레 청소기가 있다 하더라도 수시로 돌리고 먼지통을 비우고 청결을 유지하는 데에는 품이 들어간다. 그런데 뭐하러 값비싼 가전제품에 돈을 쓰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 예전에 내가 그랬다. 


물론 없어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쁘거나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러한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건 철저히 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지만, 손이 많이 가는 영유아 자녀 셋을 키우면서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특히나 나는 손이 느리고 게으르다.

원활한 일상을 유지하려면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도 해야 한다. 원만한 부부 관계를 위한 시간과 아이들의 학습을 케어하고 놀아주는 시간도 확보해야 한다. 더불어 기본으로 살림까지 붙여놓으면 하루 24시간이 늘 모자란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니. 욕심이 과해도 한참 과한 게 아닌가 싶지 않은가.

 

건조기가 벌어주는 빨래를 널고 걷는 시간, 식기 세척기가 벌어주는 세척하고 헹구는 시간, 무선 물걸레 청소기가 벌어주는 선을 꽂고 청소기를 밀고 물걸레질을 따로 하는 시간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값지다. 그거 다 해봐야 10분, 20분이지 않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서 구체적 예시를 들어볼까 한다. 

우리 집의 경우 건조기가 벌어주는 시간이 대략 30분 ~ 50분. 식기 세척기가 벌어주는 시간은 하루 두 번의 설거지를 기준으로 40분~50분 정도 예상된다. 무선 물걸레 청소기는 사용이 간편해지면서 준비하는 시간과 뒤처리하는 시간이 절약됨과 동시에 좀 더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니 시간으로만 계산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시간만으로 산출할 수 없는 편의성은 일단 계산에서 제외하고 생각해보자.


이렇게만 따져봐도 하루에 벌어들인 시간이 최소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 넘는다. 어떤 면에서 봐도 절대 적지 않은 시간인 셈이다. 




많은 책과 강연 등에서 아웃소싱은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지금 하고 있는 집안일을 아웃 소싱하는 것이 너무 비효율적이란 시각을 버릴 수 없었다. 전문성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 아이들을 맡기는 것이 더 이익인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살림에 포함된 많은 영역이 가족의 건강과 안전이 직결되는 문제라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고민의 방향을 집안일은 계속하되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쪽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가 글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아이템을 업그레이드해서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이 된 것이다.


최근에 읽은 <초집중>에서는 본 짓(인생에서 원하는 것에 다가가게 하는 행동)에 쓸 시간을 미리 떼놓으라고 한다. <나는 4시간만 일한다>의 팀 페리스도 생산성을 높이고,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라고 한다. 수시로 회의를 잡고 마구 날아드는 메신저들로 집중하기 힘든 직장인들처럼 어떤 순간에서도 엄마를 찾고 단 1분도 집중할 시간을 내어주지 않은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본 짓을 위한 시간을 타임스케줄에 빼두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24시간 아이들과 함께하는 나는 지금 어떻게 본 짓을 위한 시간을 쓰고 있을까?


Photo by Reinhart Julian on Unsplash


처음 아이들과 함께할 때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덕분에 무척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수면 시간을 줄여가며 책을 읽고 글을 써보기도 했고,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아이들이 있는 시간 안에 완료해보려고도 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은 그냥 되는대로 한다. 꼭 이 시간에는 책을 읽을 거야. 이런 계획은 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우선순위와 더불어 예상되는 시간을 책정한다. 가령 드로잉 20분, 책 읽기 1시간, 글쓰기 2시간 이렇게 말이다. 여기에 책 읽어주기 20분, 아이들과 놀아주기 1시간, 공부 점검 시간 10분, 문제 풀이 15분이 더해지면 대충 오늘 해야 할 일이 정리된다.


이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을 먹고 정리하고 설거지를 끝내고 보니 10분 정도 짬이 난다. 그럼 아이들 상태를 보고 첫째의 공부를 점검한다. 점검이 끝났는데도 동생들이 잘 놀고 있다면 이어서 책 읽어주기까지를 끝내버린다. 대략 그 쯤되면 막내가 보채니 아이들이랑 1시간가량 놀아주고 즐거움이 가득 차서 괜찮아지면 점심을 준비해서 먹는다. 뭐, 대략 이런 식이다. 허락되는 시간을 보고 그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거나, 하나의 일을 몇 번에 나누어 끝내면 된다.


이런 삶을 살아보면 유능한 가전제품들이 벌어다 주는 몇 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욱 많아진다. 물론 이렇게만 매일 지내면 하나의 일에 서너 시간 몰입하는 즐거움이 없어서 좀 슬퍼지는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아이들을 재워두고 밤 시간을 이용해 몇 시간씩 몰입을 채우면 된다. 수면 부채는 나쁘지만 단기에 채울 수 있어도 불행한 마음은 삶을 좀먹기 때문에 그냥 방치하면 안 된다는 주의다.


여기에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최소한 아이템을 업그레이드 한 비용 이상의 가치 있는 시간을 쓰고 있는지는 꼭 점검해보길 바란다. 아직 수익모델이 있는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큰소리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내가 읽고 쓰면서 자신을 채워나가는 시간은 건조기를 구입한 비용보다 값지다. 남편과 손잡고 공원을 돌면서 하루를 돌아보고 부부간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식기세척기의 값보다 기치가 있다. 이건 전적으로 내 기준이지만 말이다.


돈으로 시간을 벌어서 써보면서 느낀 점을 한 번쯤은 나누고 싶었다. (이걸 식기세척기를 구입하면서 하게 될지는 몰랐지만)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시간을 돈을 살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고 보니 좋더라. 진짜 좋더라. 이래서 다들 돈을 버나보다 싶기도 하다. 


이렇게 생긴 시간은 다른 시간에 비해 더욱 가치 있게 쓰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본전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살림 템들이 벌어준 시간으로는 딴짓을 할 수가 없다. 돈으로 시간을 벌어서 쓰게 되는 것의 생각지 못한 장점이 여기에 있다.


지금의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내 말에 공감하는 이도 있을 테지만 '가전제품 구입하라고 종용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군'이라며 의심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듯 지극히 개인적 경험에 따른 주관적인 의견이니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혹시라도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가 시간이 부족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아이템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을 고려해보길 권하고 싶다. 내가 해보니까 되게 좋아서 말이다. 이거 참 좋은데, 어떻게 더 괜찮게 설명을 못하겠어서 실력을 더 키워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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