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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Aug 29. 2020

"공부 많이 했어?"

어떡하지? 나 공부를 하나도 못했어!

시험날 아침.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받는 대부분의 첫인사는 "공부 많이 했어?"이다. "큰일 났어. 잠깐만 자고 새벽에 공부한다는 게 그냥 잤어. 어떡해." 다들 한 번씩 이렇게 대답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솔직하게 "응. 공부 많이 했어."라며 대답한 친구가 있었던가 싶다. 돌아보니 나 역시 늘 공부를 못했다고 했다. 물론 진짜 잠만 자고 놀았던 날도 많다. 그렇다고 매번 공부를 안 하고 시험을 치른 건 아니다. 그런데도 정해진 답이 있는 것처럼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만 말했던 이유가 뭘까?



Photo by Chris Liverani on Unsplash


<메타인지 학습법>의 저자 리사 손은 이것을 '가면 증후군'으로 설명한다. '가면 증후군'은 자신의 성공이 '가짜'라는 것을 남들이 알아차릴까 봐 두려워하는 '병'이라고 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노력으로 성공을 했을 때, 사람들이 천재가 아니라는 것에 실망할까 봐 불안해한다는 거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가? 우리는 성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잘했을 때 가장 흔히 듣는 칭찬이 '우와~ 천잰데!!!'인 것을 생각해보자. 집과 학교에서는 무언가 빠르게 성취한 사람, 소위 말하는 '천재'에게 더 많은 인정과 찬사를 보내는 것을 많이 봐왔지 않는가.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는 천재를 늘 우러러본다. 그렇기에 나의 성공도 '노력'이 아니라 '천재라서'로 보이길 은연중에 바라고 있다.


여기 밤을 새워 시험공부를 한 어느 학생이 있다. 시험 당일 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공부 많이 했어?"라고 묻자 이 학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떡하지? 나 공부를 하나도 못했어. 큰일 났네."
이 학생이 친구의 질문에 거짓 대답을 한 이유는 그렇게 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못 보면 친구를 '쟤가 정말 공부를 안 했구나'라 생각할 것이고, 시험을 잘 보면 '쟤는 정말 똑똑한 아이구나'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메타인지 학습법> p.83


새삼 이 부분이 다시 생각난 이유가 따로 있다. 나는 한 달간 매일 읽고 쓰겠다는 약속을 하고 '한 달 서평'에 참가했다. 계획은 늘 수정할 수 있는 것이라지만 이번엔 수정이 아니라 거의 파기에 가깝게 지키지 못했다. 예정했던 책들은 고스란히 책장에서 꺼내보지도 못한 채 한 달의 마지막 날을 바라보고 있다. 길게는 서너 시간씩 투자하며 쓰던 글들을 대부분 30분에서 한 시간 내외로 후다닥 써내기 바빴다. 퇴고는 꿈도 못 꾼 채 말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책을 많이 읽는 시기도 있고, 부득이하게(정말 부득이했는지는 잠시 접어두자) 많이 읽지 못하는 시기도 있을 수 있다. 하루 중 집중해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아이들에게 할애했으니 못 읽고 못 쓰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사실 진짜 불편한 이유는 많이 읽지 못하는 것보다 시간과 마음을 내어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음에 있다. 읽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고마워해야 하는 점이지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안 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다. 


브런치는 아무나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나는 글을 얼마나 잘 쓰느냐 못쓰느냐가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내가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검증절차를 거쳐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여주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말이다, 내게 허락된 '작가'라는 타이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드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나와는 어떠한 인연도 닿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내 글을 읽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 부응하는 글(감동이 있거나, 공감을 할 수 있거나, 유익하기라도 허거나)을 쓰는 것이 최소한의 양심이 아닐까. 정말 조금 더 시간을 낼 수 없었을까? 조금 더 고민할 수 없었을까? 이걸 글이라고 발행해도 되었을까? 읽는 것에 끝나지 않고 라이킷까지 남겨주는 마음 좋은 사람들에게 너무 양심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양심에 가시가 걸려 넘어가지도 않고 뱉어내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다.


계속해서 '책을 많이 못 읽어서',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쓰느라' 등의 핑계를 달고 살았던 이유. 이렇게라도 변명하고 싶었던 마음을 들여다보니, 공부하지 않았다고 하던 그때에서 한 뼘도 자라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독자가 '오늘 글은 괜찮은데?' 했다면 넉 달 동안 연습한 매일 쓰기가 효과가 있었네요 정도로 넘어갈 수 있지만, '왜 이렇게 횡설수설해?' 했다면 단골 핑계를 댈 수 있으니 안전하지 않은가. 


그런데... 말이다. 저 핑계가 제대로 된 이유가 맞을까?


독서와 글쓰기에도 메타인지가 필요한 것 같다. 정말 책을 읽은 양이 적어서 글이 이런 것인지, 독서량이 부족한 것인지 독서의 폭이 좁은 것이 문제인 것인지. 문해력과 사고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글을 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인지. 노력이 부족한 것인지. 정확한 원인과 결과가 있지 않을까? 물론 그 모두가 문제일 수도 있고 말이다. 정확하게 무엇이 어떻게 부족한 것인지는 매 글마다 다르다. 그걸 퉁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느라'라고만 해버리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좀 솔직해져보려고 한다. 책을 못(안?) 읽은 것도 맞고, 별로 읽고 싶지 않았던 것도 맞다. 글을 쓰지 않은 하루 종일 마음 불편하게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사실 이 글도 마감이 다가오면서 노트북을 열고나니 시작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사전에 글의 방향이나 내용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았고, 그냥 '그래! 나는 솜씨 좋게 핑계를 만들어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네.' 하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다음에는 최소한 이 핑계로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밤을 새워 공부를 했지만 방향을 잘못 잡아서 결과가 나빴던 그 어느 날이 생각난다. 공부를 했는데도 시험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진심 속상해서 눈물이 핑 돌던 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공부를 안 했으니까'하고 속으로 많이 울었던 그 날로 돌아간다면 이제는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나빴네.'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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