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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Aug 28. 2020

오늘도 주인공은 나야 나.

수고했어. 오늘도.

요즘 같은 때(아이들이 24시간 함께라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때)에는 심각하게 읽지 않아도 술술 넘길 수 있는 에세이가 좋다. 간혹 펜과 형광펜을 들고 집중해서 읽고 쓰고픈 생각이 들긴 하지만, 책을 놓지 않아도 되는 현실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에세이가 가진 장점은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에세이를 읽는 이유가 공감 가는 스토리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맞아, 나도 그랬는데.'

'그렇지 그렇지, 그런 생각이 들지. 다들 비슷한가 보구나.'

에세이는 폭풍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힘이 있다. 이는 소설과는 조금 결이 달라서 있을 법한 이야기가 주는 위로와는 또 다르다. 뭐랄까, 소설은 은근하게 따뜻한 기운으로 감싸는 위로라면 에세이는 직접적으로 살결을 느끼며 토닥임을 받는 느낌이랄까. 나와 다르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고 위로받는다. 거기에 에세이를 쓴 작가에 빙의되어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사이 내가 겪은 비슷한 에피소드를 그려보게 되기도 한다.


Photo by Ekaterina Shakharova on Unsplash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같은 삶, 영화 같은 사랑 이야기를 꿈꾼다. 힘들 때는 삶이 너무 영화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사랑에 빠져있을 때는 세상 모든 스트리에 주인공이 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시간, 우리는 너무 소소하다 못해 지루한 일상을 살고 있다고 푸념한다. 조금 더 극적일 수는 없을까? 운명 같은 남자가 배경 음악과 함께 눈앞에 나타나기를. 갑자긴 번뜩인 아이디어가 기연들을 만나 대성공의 스토리가 되기를... 


마음이 시킨 것인지, 뇌가 지맘대로 알고리즘을 돌린 영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세이를 읽고 너무 일상적이라 별 것 없을 것 같은 영화와 드라마를 봤다. 최근에 읽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에서 소개된 오구실도 그렇게 보게 된 드라마다.


선풍기에 소리 내는 장면에서 가장 크게 공감했다면 우스울까?


이 드라마엔 재벌이 나오지 않는다. 가슴 절절한 운명적인 사랑도 없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인도 없고, 출생의 비밀도 없고, 살인 사건도 없고, 도깨비도 나오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선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소개팅을 하거나 야근을 하거나 토마토를 기르거나 맥주를 마시는 게 고작이다. 물론 호감 있는 남자와 셀레는 순간들도 있지만, 보통의 드라마에서 멋진 남자들이 죄다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것에 비하면 대체로 시시하다. 이런 이야기들로 드라마가 되나 싶지만, 그 시시함이 이 드라마의 매력이다. 내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별거 아닌 이야기도 드라마가 될 수 있다니. p. 426


왜 시시하다고만 생각하죠?

당신의 하루는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주인공 오구실은 무척 평범하다. 매우 평범해서 사랑스러운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전화 한 통에 달려올 내 친구 같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을 때 눈인사를 나누는 동료 같기도 하다. 그런 그녀의 일상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한다.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녀가 보여주는 그 모든 순간에 나를 덧씌워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몇 권의 에세이와 고만고만한 이야기를 담은 영상들을 보면서 '지금 내 삶에도 편집과 음악 그리고 커피소년의 내레이션이 입혀진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 설거지가 산처럼 쌓였지만 눈을 감고 아이들과 종이컵을 쌓고 던지며 놀이를 한다. 내가 없으면 아이들이 잠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생아도 아니면서 밤잠도 잘 자고 낮잠도 잘 잔다. 다 같이 놀다 지치면 불량식품을 간식으로 먹으며 낄낄거리고, 너무 힘든 날은 남편과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시름을 잊어본다. 이 모든 순간을 영상으로 남긴다면 아이들이 자라는 매 순간이 그림 같고 행복했다며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의 칭얼거림이 극도에 달해 화가 펑하고 터질 것 같던 날. 화를 내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바람직할 것 같지도 않아 그냥 앞치마를 두른 채 저녁밥을 하다 말고 집을 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편에게 가출 소식을 알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노트북에 연결되어 있는 내 카톡창으로 첫째가 남편에게 카톡을 남겼다. 



집을 나서는 나의 모습. 엄마가 갑자기 집을 나가서 너무 놀란 8살 5살 3살. 그리고 카톡. 생각지도 못한 이모티콘까지. 어쩌면 커피소년의 내레이션이 없어도 드라마 속 에피소드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자꾸만 진지해지고 싶고 무언가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것 같은 요즘이긴 하다.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은 인생 드라마의 주인공인데 말이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오늘도 주인공은 나이고, 언제나처럼 나는 오늘도 수고했다. 그냥 오늘은 그러고 싶은 날이다. 나에겐 글 쓰는 시간을 벌어주느라 아이들 씻기고 설거지해 주는 도깨비보다 나은 신랑이 있으니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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