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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Mar 19. 2021

현명한 아홉 살

나보다 괜찮은 너



요즘은 사람이 보이는 글을 읽는 게 퍽 두렵고 무척 흥분된다.

실은 이 문장 하나를 쓰면서도 몇 번이나 생각했다. 책 읽기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행복하지만 않은 독서로 인해 매일이 괴롭고 행복하고 죄스럽고 설렌다. 글 실력이 짧은 게 원통할 만큼 복잡하고 너무 버거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잘 모르겠지만 남겨야 할 일이 생겨서 자리에 앉았다.


Photo by Vitaliy Makerov on Unsplash



한때 소설 속 이야기에 빠져 현실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 시절 소설은 도망치고 싶은 현실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장편소설들을 읽어치웠던 때가 차라리 그립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소설을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 자꾸만 사람에 빠지게 되는 건 제법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김영하 작가는 [읽다]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에도 사람이 있다. 글을 적은 이가 있고, 글을 적은 이가 겪은 이가 있고, 글을 적은 이가 관찰한 이가 있고, 글을 적은 이가 선망하는 이가 있다. 덕분에 묻어두었던 사람에 대한 애정과 연민, 증오, 원망, 그리움, 자책이 마구 들어와서 속이 말이 아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이 적절하지 않게 흘러넘치는 일은 없었으면 싶어 아홉 살 딸아이와 걷던 중에 흘려보내듯 말했다. 잘 모르는 아이에게라도 털어놓으면 한결 나아질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요즘 엄마가 책을 읽는데, 마음이 좀 복잡해.”

“왜?”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살아있는 것 같거든. 나도 저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걸 하거나 생동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런데 엄마는 용기도 없고 강단도 없고 끈기도 없고……. 결국 너무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꿈을 이루지 못한 셈이잖아.”

“나는 뭐든지 다 되는 게 꿈이야. 그렇지만 내일 뭘 할지 미리 생각하진 않아.”

“?”

“모든 게 될 거지만 오늘은 오늘 즐거운 일을 하고, 내일은 내일 즐거운 일을 하면 되니까.”


눈물이 핑 도는 걸 간신히 참았다. 우문현답이 이런 건가 싶었다. 이상하게 말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듣고 답을 찾아내는 아이가 순간 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건가 싶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된다고 아이에게 말해준 건 나였다. 그 속에 숨겨진 진심을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어른스럽게 현재에 충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나와 다른 현명함에 의도치 않은 위로를 받았다.


사람은 늘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한다. 그 덕에 이루지 못할 꿈이란 걸 알지만 죽을 때까지 쫓을 수 있는 것일 테고, 영원히 고뇌하면서도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태양을 향해 날아오른 이카루스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동경하지 않으면 괴롭지 않을 테지만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설사 떨어지더라도 끝까지 날아보고 싶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여전히 책을 읽는 건 두렵고 흥분되는 일이다. 아이의 현명함에 기대어 어제보다는 조금 더 용기를 내본다. 다시 또 복잡해지더라도 조금 울고 많이 위로받았으니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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