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다혜 Mar 28. 2016

영화 Air Force One과 통역사

중학교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연히 영화 “Air Force One”을 보게 되었는데, 영화 초반부에 인질 테러범을 검거한 것을 축하하는 리셉션이 열리는 장면이 나왔다. 미국 대통령(해리슨 포드)이 각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러시아 대표의 소개로 포디움에 서서 연설을 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분명히 화면에서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미국 대통령 한 사람인데 동시에 어디선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은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 미국 대통령을 보면서 다들 귀에 무언가를 끼고 그 조그마한 기계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은 바로 동시통역을 하고 있는 통역사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순간을 기억하면 다시금 짜릿한 전율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아무리 각국의 정상들이 모인 중요한 자리라고 하더라도 통역사 한 사람이 없었다면 언어 장벽(language barrier)으로 인해 그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번 본 적도 없는 통역사에 대한 호기심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영화 Air Force One 의 한 장면 (1998) -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난 뒤 환호를 보내는 청중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방과 후 영어클래스에서 처음으로 영어를 접하게 되었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곧잘 선생님을 따라 하고 그 당시 우리 학교에 와계셨던 미국인 선생님과 간단하게나마 대화도 하며 즐거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랑 팀을 만들어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기도 하고 엄마를 졸라서 집에서 방문학습지로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친구들이랑 영어로 게임하고 외국인 선생님이랑 재미있게 수업을 하는 게 그저 좋아서 싫증 내지 않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데 그쳤을 뿐, 영어를 내 평생 업으로 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영화 “Air Force One”을 보고 통역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다. 학교 수업은 기본이고 각종 영어대회에 참가하기도 하고 또 거기서 만난 다른 학교 친구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연습하며 다양한 경로와 방법으로 영어에 꾸준히 노출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솔직히 한 번도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어의 장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뼈저리게 하게 되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찾고 게이트를 걸어나가는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방엔 온통 외국인들 뿐이고 모두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저마다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정말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영국 악센트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고, 나는 영국 악센트가 미국 악센트와 그 정도로 다를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엄마를 졸라서 혈혈단신 무작정 유학을 간 것이었다. 다행히 친절하고 상냥한 호스트 패밀리를 만나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집을 나서면 하나에서 열까지 내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영어시간이 제일 즐거웠고 영어 때문에 주눅 든 적은 없었는데, 영국에서는 뜻하지 않게 매우 조용한 동양 여자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등교 첫날 교실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나같은 외국인은 한 명도 없고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학생들은 영국 학생들이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소개를 하고 각자 돌아가면서 이름과 간단한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하필 내가 선생님 바로 옆에 앉아있는 바람에 선생님이 나한테 제일 먼저 질문을 하셨다. 

“Chloe, where are you from?” 

나는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I am from South Korea.”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바로 직감했다. 모두 외국인 학생들로 구성된 어학연수 클래스가 아니라 영국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학생들은 영국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선생님은 내가 어느 동네에 사는지를 물어보신 것이었다. 정말 너무너무 창피해서 교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반 친구들은 다들 착하고 내게 호의적이었다. 쉬는 시간에 우르르 몰려와 “한국은 어디에 있는 나라니?” “넌 몇 살이야? 17살? 16살?” “그럼 너는 무슨 말을 하니? 일본어? 중국어?” 등등 다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많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들의 질문을 다 알아듣고 대답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영국에 오기 전까지는 내가 태어나서 자란 대한민국이 내게는 세상 전부였는데 한국을 벗어나 보니 나의 모국이 그렇게 작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때는 한류 열풍이 불기 전이라 영국 친구들 중에는 심지어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중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한국어를 말한다는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머, 정말? 너네 나라도 언어가 있어?”라고 물어보는 친구를 보며 처음엔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그럴 수도 있겠다고 받아들이게 되었고, 학교 친구들 뿐만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나 같이 차를 마시거나 식사에 초대받을 때마다 미리 공부를 해가서 열심히 우리나라에 대해서 알리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 대해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중에서 유엔에 근무하시던 아저씨 딱 한분뿐이었다. 전쟁을 겪은 후 짧은 시간 안에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어 낸 기적의 나라라고 다른 이웃들에게 소개해 주실 땐 정말 눈물이 날뻔했다. 영어의 알파벳과는 완전히 다른 한글의 원리를 설명해 드렸을 때 다들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춰서 완성하는 그림 같다며 신기해하는 걸 보고, 더 힘을 얻어 6.25 전쟁을 우리 할머니 세대가 직접 겪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원리 등등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분들께 조금이라도 더 우리나라에 대해서 알려드리려고 애썼다. 그땐 장차 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이 될 줄 그 동네 사람 어느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영국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핸드폰을 사러 갔다가 내 말을 가게 아저씨가 못 알아들어 결국 못 사고 나온 게 너무 속상해 그날 밤 배게가 흠뻑 젖도록 울다 잠들었던 일, 친구랑 시내에 쇼핑하러 갔다가 계산대 앞에서 실수로 줄을 잘못 섰는데 내 뒷사람 말을 내가 못 알아들어 줄 서 있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했던 일 등등 영어 때문에 실수하고 창피했던 순간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동시에 내 마음속에서 오히려 굳어졌던 다짐은 바로 꼭 통역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내가 겪은 일은 한 고등학교의 작은 교실 안, 시내 핸드폰 가게 등에서 일어난 사소할 수 있는 작은 일화에 지나지 않지만, 더 큰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훌륭한 통역사가 되어서 우리나라가 세계무대에서 언어 때문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매일매일 잠들기 전 다짐했다. 


우리나라가 세계무대에서 굳건히 우뚝 서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다른 많은 요소들도 있겠지만 언어에 있어서 만큼은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데 조금이나마 내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통역사가 되겠다는 꿈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법과 영어 연구소 아우디오 랩]

https://www.instagram.com/audiolab.chlo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