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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혜 Mar 28. 2016

언제나 그리운 영국, England

꿈만 꾸던 영국으로 드디어 유학을 가던 날 공항에서 엄마가 결국 눈물을 흘리셨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먼 나라에 왜 그렇게 가고 싶어 하냐고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두려움보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은 영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두근두근거렸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 Sussex Downs College는 Lewes라는 작지만 동화같이 예쁜 마을에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걸렸는데, 집 앞 작은 공원, 나무 하나하나, 마치 동화 속에 나올 것만 같은 아기자기하게 지어진 집들, 눈만 마주쳐도 따스하게 웃으며 미소 짓는 영국 사람들 덕분에 등하굣길이 매일매일 새롭고 즐거웠다.


Grange Garden in Lewes, England

 영국에 살면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영국 사람들의 국민성이었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그리 넓지 않은 좁은 도로들이 이어져 있었는데, 인도는 더욱 좁아 두 사람이 지나가면 서로 부딪힐 정도였다. 하루는 아침 등굣길에 언제나처럼 이어폰으로 BBC 뉴스를 들으며 좁은 인도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길 저 끝에서 한 할아버지가 가만히 서계신게 보였다. 아침에 산책 나오셨구나 하고 생각하고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그 할아버지 가서 계신 곳 까지 걸어갔는데, 내가 가까이 가자 그제서야 빙그레 웃으시더니 내가 지나온 길로 걸어가셨다. 인도가 좁아 가운데서 만나면 서로 부딪힐걸 생각하셔서 내가 그 길 끝까지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처음엔 그 할아버지가 유난히 친절하신 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이 틀렸다. 


얼마 후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도로에서 차들이 줄지어 밀려있는 걸 보았다. Lewes의 거의 모든 도로는 교차로마다 roundabout이 있어 차들이 신호를 기다리는 일이 없는데 웬일이지 하며 서있는 차들을 지나쳐서 걸어갔다. 그 줄이 끝나는 지점 즈음에 왔을 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도로 옆 한 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차에서 물건을 꺼내느라 차 앞문을 열어놓고 한참을 짐을 정리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다면 1분도 채 안되어 차들이 빵빵거리고 운전자들이 고함을 지르고 난리가 났을 텐데, 열대도 넘는 차들 중에서 고함은커녕 클락션을 울리는 차는 하나도 없었고, 중앙선을 넘어 그 차를 지나가지도 않고, 다들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평온한 얼굴로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장면은 내게 신기하기까지 했다. 


영국 사람들의 국민성에 감명받은 일화가 또 하나 있다. Lewes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이면 런던까지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 간 초기에는 주중에 용돈을 아껴 거의 매 주말마다 친구들과 런던에 가곤 했다. 런던 브리지 위에서 도로 반대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예뻐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지나가는 차들 때문에 카메라를 들었다 놨다만 반복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빨간 이층 버스가 바로 앞에서 멈추길래, 이때다 싶어 얼른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제야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서있던 지점은 횡단보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버스정류장도 아니었는데 이층 버스가 왜 멈췄지? 하며 고개를 들어 그 버스를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운전기사 아저씨가 웃으며 손으로 엄지를 들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부터 내가 카메라를 들었다 놨다 하며 사진을 못 찍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내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일부러 자가용도 아닌 버스를 멈춰주신 것이었다. 창문으로 바라본 승객들, 이층 버스 위에 타고 있던 사람들 아무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순간 “우와...”하는 감탄사가 내 입에서 절로 나왔다. 


이 외에도 영국 사람들의 친절과 매너에 감동받은 순간은 너무나도 많다. 신사의 나라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영국에 사는 동안 수많은 경험을 통해 생생하게 느꼈다. 삶이 여유로우니 이런 친절이 절로 우러나올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하고 부러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우리나라 사람들도 OECD 회원국 중에서 우리나라가 경제 순위 몇 위를 차지하는지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는 물론이고 외국인들에게까지 이렇게 여유롭고 너그러운 친절을 베풀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를 평가하는 많은 잣대 중 하나가 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베푸는 작은 친절과 몸에 밴 매너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직업의 특성상 외국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내가 하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학생들에게도 기회가 될 때마다 국제회의와 같은 통역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 특히 통역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우리나라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려고 한다. 통역을 잘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클라이언트들과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위적인 친절이 아니라 진심 어린 배려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친절은 효과적인 의사전달을 도울뿐만 아니라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많은 통역사들이 통역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러한 역할은 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통역사가 할 수 있는 보석 같은 일 중 하나다. 특히 외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클라이언트일 경우, 작은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먼저 챙겨줄 줄 아는 통역사의 진가는 빛을 발한다. 


내가 5년 넘게 일했던 외교부에 계시는 분들은 다들 외국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대부분 글로벌 매너를 잘 알고 계신다. 옷차림만 봐도 국내 업무가 주를 이루는 다른 부처 분들과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아직도 많은 분들이 잘 몰라서 저지른 작은 실수로 외국인들과의 미팅에서 좋지 않은 인상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남자분들이 여름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반팔 와이셔츠를 입는 것, 중요한 식사자리에서 마음대로 겉옷을 벗어버리는 것, 음식을 씹을 때 소리를 내는 것 등 한국 문화에서는 별 문제 되지 않는 사소한 것들이 외국인들의 눈살을 지푸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매년 미국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주한 미국 대사관 주최로 열린다. 지난여름, 운 좋게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한껏 들떠서 행사가 열리는 그랜드 하얏트 호텔로 향했다. 리셉션장에 들어서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화려한 샹들리에에서부터 시작해 파티장의 규모, 참석한 사람들의 화려한 차림새, 너무나 예쁘게 차려진 핑거푸드들 모두 정말이지 영화에서 본 것 같은 파티였다. 그날 가장 내게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바로 성킴 미국대사님과의 짧은 만남이었다. 파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대사님은 인턴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이야기가 끝나기를 잠시 기다려 사진을 찍고 싶다고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영어로 말을 해야 하나 한국어로 말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한국어로 여쭤봤더니 대사님은 흔쾌히 응해주셨다. 사진을 찍기 위해 대사님 옆에 서서 포즈를 잡으려는 그 순간, 대사님께서 아직까지도 감명 깊기까지 한 한마디를 하셨다. 

“재킷 벗었는데, 괜찮아요?” 


공식행사도 다 끝이 나고 파티가 거의 끝난 무렵이어서 대사님께서는 타이도 풀르시고 쟈켓을 벗 고행 사장을 떠나시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 한마디가 내게는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재킷을 벗고 있는 것이 매너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대로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내게 양해를 구하신 것이었다. 매너라는 것은 크고 거창한 것이 절대 아니다.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이렇게 작은 배려 하나하나가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는 것, 그게 바로 매너인 것이다. 소개팅에 나갔는데 상대 남자분이 겉옷을 벗기 전에 “쟈켓 벗어도 괜찮을까요?”라고 한마디만 한다면 내 눈엔 그 누구보다 그 남자분이 멋져 보일 거란 생각도 잠시 해봤다. 그 한마디가 많은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물론 영어실력도 많이 늘었지만, 아니 영어를 아예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배우고 왔지만, 또 하나 배운 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따뜻한 배려를 기반으로 오가는 진심의 힘이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문화와 지리적 배경에서 살아온 사람들과도 마음을 열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진심으로 대화할 수 있는 법을 그때 배웠다. 진정한 네트워킹의 힘은 내가 통역사로서 지금까지 일을 해오는 데 있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법과 영어 연구소 아우디오 랩]

https://www.instagram.com/audiolab.chl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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