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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혜 Mar 31. 2016

드디어 UN에 가다!

태국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국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날씨나 환경 등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설렘만 가득했다. 다섯 시간 남짓 결코 길지 않은 비행이 금방 끝나고 방콕 쑤완나품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을 때까지는 몰랐는데, 미리 마중 나와있던 기사분을 만나 차가 있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치 옷을 입고 사우나에 들어간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TV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을 찍은 PD분들이 쇼프로에 나와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아마존 현지 더위가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라며, 마치 헤어드라이기를 입에 넣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바로 이런 더위를 말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며 그 순간 내가 이렇게 숨이 막히는 곳에서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잠시 했지만, 세상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잘 살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 내게 더위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적응력 하나는 타고났다고 자부한다. 차를 타고 호텔로 가는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았던 곳, 유학했던 영국, 여행했던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고, 새로운 곳에서 생활을 시작한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먼저 파견되어 일을 하고 계셨던 부장검사님을 처음 뵙자마자 바로 UNODC를 비롯해 ESCAP 등 여러 유엔기구가 모여있는 UN 콤플렉스로 향했다. 마침 사무실에서는 전체 회의가 있는 날이어서, 그 자리에서 나는 내 소개를 하고 앞으로 함께 일할 동료 직원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내 자리로 안내를 받아 가보니 컴퓨터 세팅에서부터 책상 서랍엔 각종 문구류까지 세심하게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태국 직원들을 비롯해 유럽, 아시아 등등 세계 각지에서 온 동료직원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먼저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고, 나는 모든 것이 생소한 환경이었지만 금방 적응하고 동료들과 하루하루 즐거운 회사생활을 했다. 얼마 후엔 앞으로 내가 지낼 flat으로 이사도 했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모든 것이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다. 욕실, 키친, 작은 베란다, 침실, 거실이 있는 투룸이었고 가구도 모두 새것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침실을 가득 채운 커다란 퀸사이즈 침대였는데, 새벽까지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새하얀 이불에 피곤한 몸을 푹 파묻으면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아파트 실내엔 운동을 할 수 있는 gym이 있었고, 야외엔 수영장이 있었는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수영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방콕 생활 중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점 중 하나이다. 내 방 창문 밖으로는 라마 8세 다리가 정면으로 보였는데, 밤에는 다리에 설치된 조명이 너무 예뻐 침대에 누워서 한참을 바라보며 잠들곤 했다. 태국 음식도 점점 좋아하게 되었고,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방콕 생활에 익숙 해져 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처음 방콕에 와서 너무 금방 적응을 해서 검사님께서는 놀라셨다고 한다. 어딜 가나 항상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는 것도 내 인생에서 참으로 커다란 행운인 것 같다.

 

본격적으로 AsiaJust 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먼저 각국의 서로 다른 법률체계에 대한 상호 이해가 우선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법, 특히 자산 몰수와 관련된 법령과 법무부 및 대검찰청 등에서 보내온 각종 관련 자료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형사정책연구원에서 번역했던 자료들은 대부분 학술논문의 성격이어서 academic 했다면, UNODC에 와서 번역하게 된 자료들은 수사매뉴얼, 법령 등 보다 실무적인 성격의 문서들이었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처럼 이름도 생소한 몰수 관련 우리나라의 법령과 관련 다른 문서들을 번역하는 게 나에게는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한국어로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대략 짐작이 갈 뿐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그걸 영어로 번역을 해야 하니 정말 막막했다. 


위법성 조각사유? 


자료를 현출 한다고? 공판? 재판? 뭐가 다른 거지? 검찰 송치... 는 또 뭐야... 빽빽한 글씨로 가득 찬 문서를 바라보며 나는 하염없이 한숨만 내뱉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구원에서는 박사님들이나 인턴 친구들한테 물어볼 수나 있었지만, 이 곳에는 부장검사님을 제외하면 한국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디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사전, 인터넷 등등 여러 자료를 찾아서 그 단어 또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를 겨우겨우 파악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그걸 적절한 영어 표현으로 옮기느라 한참을 끙끙대야 했다. “무슨무슨 법률 제 몇 조 제 몇 항에 규정된...”이라는 맥락에서 “규정된”이라는 표현에 적절한 영어 표현으로 “provided for” 등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기까지 몇 시간씩이나 걸리는 식이었다. 명사로 된 단어를 한영사전에서 찾는 건 비교적 수월했지만, 그 단어 앞뒤로 어떤 동사나 부사를 써서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공부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그때 내 책상 위에는 이렇게 어렵게 알아낸 표현들을 써서 붙여놓은 색색의 포스트잇으로 가득했다. 또 어떤 문서는 조사 빼고는 모조리 한자로 되어 있어 한자를 잘 모르는 나에게는 정말 해독 불가인 것도 있었다. 그 문서는 검사님께 도움을 청해 검사님 책상에 나란히 앉아 검사님께서 한자를 한글로 불러주시면 열심히 받아 적어와 번역을 한 적도 있다. 낮에는 8월에 한국에서 열릴 고위급 검찰회의 준비를 하느라 서울의 대검찰청, 법무부, 외교부, 국정원 등 관계 부처와 연락을 하고 자료를 주고받고, ASEAN 10개국의 관계부처의 담당자들과 연락을 하고, 초청장을 보내고 발표자료를 모으는 등 회의 준비를 하는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일과가 끝난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번역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법령과 각종 법률 문서들을 영어로 번역하기 위해서 참조할 수 있는 자료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대륙법인 독일법을 계수한 우리나라의 법체계와 미국의 보통법 체계가 어떻게 다른지는 고사하고 두 법체계가 다르다는 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너무 막막해서 눈물이 날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해내어야 했고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태국 땅에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퇴근한 조용한 사무실에서 한쪽엔 우리나라 법령을 가득 프린트해서 쌓아놓고, 그 옆엔 미국에서 발행한 관련 자료들을 가득 프린트해서 쌓아놓은 채 그 속에 파묻혀 새벽이 다되도록 그 둘을 비교하고, 분석하고, 공부했다. 정말 비효율적인 방법이지만 그때 나는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벽 4-5시쯤이 돼서야 퇴근하고 집에 가서 샤워하고 옷만 갈아입고 다시 출근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한 번은 야근을 하다 출출해져서 같은 사무실 동료가 퇴근하면서 주고 간 고구마를 데워먹으려고 전자레인지에 돌려놓고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너무 오래 돌려서 고구마를 넣었던 종이봉투에 불이 붙었고 화재경보기가 울렸는지 security guard 아저씨 두 분이 허겁지겁 사무실로 뛰어들어올 때까지 나는 책상 위에서 잠들어 있었던 적도 있다. 그 다음날 그게 소문이 나는 바람에 동료들이 퇴근하면서 


“Chloe, be careful!” 

“Stay awake today!” 

“Don’t burn the whole office.” 


등등 다들 농담 섞인 한 마디씩을 하고 가기도 했다. 또 UN 건물은 정기적으로 전체 전기점검을 하느라 한 달에 한 번 정도 일요일에는 전체 건물의 냉방 시스템이 꺼지는 날이 있다. 그 공지를 못 보고 어김없이 주말도 반납하고 출근한 어느 날에는 사무실에서 뜨거운 컴퓨터의 열기까지 더해셔 정말 사우나에서 공부를 하는 것처럼 더운 가운데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다 나중엔 거의 탈진상태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시설관리를 담당하는 부서 직원이 나를 찾아와 조용히 이번 주말에 또 정기점검을 하니 사무실에 오면 안 된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때 다른 동료들이 웃으며 왜 그걸 Chloe한테만 얘기하냐고 물으니, 그 직원이 답하기를 “여기서 Chloe 말고 주말에 회사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는 바람에 다들 한바탕 크게 웃은 적도 있다. 우리 사무실의 대표인 Gary도 퇴근하면서 다른 직원들한테는 간단하게 “Bye!”하고 인사하면서도 내 자리를 지나갈 땐 가까이 다가와서 “Chloe, don’t stay too late!” 하며 미소를 지어주곤 했다.


한 번씩 여유가 생길 땐 회사 친구들과 수쿰빗에놀러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쇼핑도 하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내가 살던 아파트를 처음 구할 때 나를 도와준 그 아파트 에이전시 직원으로 처음 만나 친해져서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내는 친구 Ja랑 방콕 곳곳을 관광하기도 하며 태국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한국에서 사서 간 태국 여행책자에 소개된 맛집, 예쁜 가게들을 너무나 부지런히 찾아다녀서 친구들이 그 책을 “Chloe’s bible”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그 친구들도 몰랐던 새로운 곳들을 내가 계속 찾아내어 같이 가고 했더니 나중에는 같이 가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이 늘어나서 거의 동호회 수준이 되었다. 사원에 가서 같이 기도도 하고, 태국의 연예인들이 많이 참석하는 Absolute Vodka 론칭 파티에 초대받아 방콕에서 제일 유명한 클라우드 바에서 각종 칵테일을 마음껏 맛보며 밤새 파티를 즐기기도 하고, 일요일 오전 한가롭게 브런치를 즐기기도 하면서 일이 많고 바쁜 와중에도 부지런히 방콕 생활을 즐겼다. 착하고 순박한 태국 사람들, 색다르고 맛있는 태국 음식, 서비스가 친절이라는 단어로는 모자라고 황송하기까지 한 스파, 화려하면서도 독특한 사원들, 무엇보다 항상 나를 우선으로 배려해주고 작은 것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도와주는 너무나 좋은 동료들 등등 점점 태국이 좋아졌다.


이제 8월에 있을 회의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범죄수익 환수 및 테러자금지원에 대응하기 위한 검찰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검사장급 등 아세안 국가의 고위급 검사 3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한국의 관계부처들과의 전화통화도 점점 더 잦아졌다. 나는 정말이지 손발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루는 회의 참가자들의 발표자료를 모아야 했기 때문에 나는 회의 설명자료와 함께 필요한 자료를 보내달라는 이메일을 회의 참가자들 전체에게 보냈다. 그날도 어김없이 혼자 늦은 밤까지 야근을 하고 있었는데, 태국 Attorney General’s Office(우리나라의 대검찰청) 소속 Jumpon 검사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회의 준비를 하는 동안 누구보다 많이 도와주시려고 애를 써주신 검사님이셨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예쁜 선물과 함께 맛있는 식사도 대접해 주셨던 분이다. 지금도 Facebook으로 종종 안부인사를 나눈다. 나는 이렇게 빨리 자료 준비를 하셨나? 하며 메일을 열었다. 메일의 내용은 뜻밖이었다. 내가 요청한 자료는 각국의 몰수 관련 법령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영사전에서 “몰수”를 검색해서 찾은 confiscation과 forfeiture라는 단어 둘을 섞어가며 썼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영어로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 중 하나가 바로 똑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 원칙에 충실하느라 두 단어를 이리저리 섞어가며 썼지만, 법률문서의 맥락에서는 통하지 않는 원칙이라는 걸 몰랐던 것이다. Jumpon검사님은 친절하게 왜 그게 문제가 되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서, 태국의 해당 법령 조문을 첨부해서 보내주셨다. 요는 각 국가마다 한국어로는 “몰수”에 해당하는 개념을 지칭하는 용어가 다르고 또 그 적용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그 개념을 정확히 명시해주지 않으면 혼란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이메일의 내용을 수정해서 보냈고, 무사히 모든 참가국으로부터 자료를 다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나는 작은 것 큰 것 할 것 없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걸 learn the hard way(어렵게 습득하다)하느라 매번 끙끙댔다.


하루는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내 목소리가 밝지 않은걸 눈치채셨는지 “일이 힘에 부치나?”하고 걱정스레 물으셨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그동안 남몰래 속으로만 담아 두었던 설움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애써 눈물을 삼켰던 적도 있다. 하나도 쉽게 넘어간 적이 없이 나 홀로 타국 땅에서 매일 실수하고 깨지며 익히느라 밤마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지만 그때 힘들게 얻은 모든 경험들이 지금까지도 큰 힘이 되고 있다. “필요 없는 경험은 없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그래서 지금도 진로 걱정을 하는 주위 동생들이 예를 들어 모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 경력이 앞으로 취업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거나 하는 질문을 하면 나는 두말 않고 무조건 해보라고 적극 권한다. 가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인생길이다. 그리고 똑같은 길을 가더라도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그 인턴 생활을 하면서 내가 어떤 걸 느끼고,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배움을 얻고, 또 나중에 어떤 기회가 내게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경험해보기 전에 하는 추측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뜻밖의 인생 교훈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다가 이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 그건 실패가 절대 아니다. 아예 그 길을 가보지도 않은 사람은 모르는 또 하나의 배움을 얻은 것이다.   


드디어 회의 날짜가 다가왔고 나는 방콕사무소에서 이번 회의를 도와주고 있는 이웃팀의 P’Yui(유이 언니)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하필 그날 밤 방콕 날씨가 좋지 않아 비행기가 두 시간이나 delay 되었다. 회의 참석자들보다 먼저 가서 안내를 해야 하는데 우리가 더 늦게 도착하게 되어 한국으로 가는 길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서울에 도착해서 전화기 전원을 켜자마자 예상대로 전화와 메시지가 수십 개 남겨져 있었고 공항 의전팀, 호텔 의전팀 할 것 없이 수없이 많은 전화가 오는 바람에 전화기 배터리도 금방 방전되고 발았다. 호텔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참가자들 안내부터 시작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거나 잠시 쉴 틈도 없이 먼저 도착한 참석자들이 시내를 돌아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앞으로 도착할 참석자들을 위해서 공항 의전팀과 호텔 의전팀을 적절히 배치하는 등 상황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루 종일 낮에는 회의 참석하고 중간중간 참석자들의 요구사항을 처리하고, 저녁 만찬까지 그날의 행사가 모두 끝나면 숙소로 돌아와 다음날 회의자료를 정리하고 공지사항을 각 방에 전달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회의 기간 내내 거의 잠을 못 잔 것 같다. 하지만 그동안 회의를 준비하면 서각 국의 담당자들과 전화와 이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다가 서울에 와서 드디어 만나게 되었는데, 많은 분들이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던 Chloe가 이렇게 어린 여자아이(?) 일 줄은 몰랐다며 놀라워하셨다. 그리고 회의 기간 내내 내가 힘들지 않게 해주시려고 모두들 애써주셨다. 다들 각자 자기 나라에서는 고위급 검사이신데 이동을 하거나 공지사항을 전달하거나 할 때면 아이처럼 고분고분 내 말을 잘 듣고 따라주셨다. 그래서 회의 기간 내내 잠을 못 자 힘들었지만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실수도 많았지만 모두들 웃으며 이해해주셨고, 떠나는 날 아침에 배웅을 나갔을 땐 다들 자기 나라에 올 기회가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하시거나 방콕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시는 등 헤어지는걸 서로 아쉬워했다. 출국 날짜와 시간을 꼼꼼히 체크해서 차량을 배치하고, 대표단 중에서 혼자 먼저 떠나야 하는 분까지 챙겨서 차량을 배치해드리는 등 내 나름대로는 처음 하는 일이었지만 잘해내려고 잠을 아껴가며 무던히 애를 썼다. 덕분에 회의가 끝나고 나서 방콕으로 돌아왔을 때 회의 기간 동안 세심히 배려해줘서 고맙다는 이메일을 많은 분들로부터 받았을 땐 정말 뿌듯했다.


방콕에서의 근무기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엔 동료 친구들과 함께 차를 렌트해서 다 함께 여행도 다녀오는 등 아쉬운 이별준비를 했다. 마지막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날엔 20명 가까이 되는 거의 모든 동료들과 함께 수쿰빗에서 저녁을 먹으며 환송파티를 했다. 내가 태국 음식 중에 특히 쏨땀을 좋아했는데, 사무실에서 쏨땀을 배달시켜 빈 방에서 동료들과 소리를 죽여가며 먹었던 재미있는 추억도 있다. 그걸 기억했던 동료들은 수쿰빗에서 제일 유명한 쏨땀 전문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 주었고, 우리가 도착했을 땐 그 가게에 있는 모든 종류의 쏨땀을 전부 시켜주었다. 테이블 가득 쏨땀을 주문해 내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이렇게 많은걸 다 못 먹을 것 같다고 하니 동료들은 한국 가기 전에 좋아하는 쏨땀을 종류별로 다 먹어보고 가게 해주고 싶어서 많이 주문했다며 걱정 말고 맛있게 먹으라고 했다. 동료들의 따뜻한 마음씨에 나는 또 한번 감동받을 수밖에 없었다. 방콕 생활 초기에 택시기사 아저씨가 영어를 전혀 못하는 바람에 집에 못 갈까 봐 걱정이 되어 택시 뒷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던 일을 겪고 나서, 사무실의 태국 동료에게 근처 백화점, 공항 등 내가 자주 가는 장소를 태국어로 써달라고 부탁해 그 노트를 들고 다니며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보여주는 요령이 생겼다. 이처럼 방콕에서 나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부딪히며 배웠다. 그렇게 눈물과 감동으로 얼룩진 짧은 방콕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법과 영어 연구소 아우디오 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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