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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혜 Mar 31. 2016

내 첫 직장,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원에서 처음 맡게 된 일은 곧 브라질에서 열릴 형사사법 관련 국제회의에서 검사님이 하실 발표 준비를 돕는 것이었다. UN에서 온 이메일을 읽어본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모든 문장들이 새로웠고 신기했다. 검사님이 발표하실 원고를 함께 만들고, 영어를 다듬고, 고치고 또 수정하기를 반복했고, 원고가 완성된 후에는 영어로 원고를 읽는 연습도 도와드렸다. 브라질까지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연습하실 수 있도록 원고를 녹음해서 MP3에 담아드렸다. 그 일을 하면서 검사님께서는 한글로 된 그 어떤 것도 갖다 주기만 하면 영어로 척척 만들어내니 마치 동전만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동판매기 같다고 하시며 내게 


“자판기”

라는 별명을 붙여주시기도 했다. 


정부기관이나 회사가 아닌 연구원이라서 좋은 점은 무엇보다 공부할 수 있는 자료가 무수히도 많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법학 관련 교양수업 한번 들어본 적 없었던 내게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범죄학, 형법, 사회학, 범죄심리학, 사이버범죄 등등 형사사법 관련 각 전공 박사님들이 각자 개인 및 공동 연구를 해서 연구보고서, 학회 발표자료, 학술지에 실릴 논문 등의 자료를 만들면 나는 그것을 영어로 번역을 했다. 작업을 하다가 이해를 못한 부분이 있거나 특정 표현이나 용어를 잘 모를 때에는 해당 박사님 방에 찾아가 여쭤봤다. 박사님들 방은 하나같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차있었고, 내가 질문한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실 뿐만 아니라 참고할 수 있는 여러 책과 자료도 한가득씩 안겨주시고는 했다. 연구원에 와서 처음 접한 이 새로운 분야가 내게는 정말 흥미로웠다. 인턴으로 일하던 박사과정 학생들이랑도 친하게 지내면서 전공 관련 자료를 찾는 법에서부터 시작해서, westlaw 사용하는 법 등등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당시에는 미국 드라마도 범죄 관련 드라마만 골라서 봤다. 어떤 장면에서 한 남자가 “I am the only witness!”라고 소리치니 형사가 “eyewitness?”라고 되묻는 장면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그거 아닌가? 왜 다시 물어보는 거지? 하고 잠시 궁금해 하긴 했지만, 직접 본 증거와 전문증거(전해 들은 증거)의 효과가 다르다는 것을 내가 그 당시에는 알리가 없었다. 점점 형사사법 분야에 흥미가 생기면서 언어 실력 만으로는 이 전공분야의 심도 깊은 내용을 내가 충분히 소화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살인”이라 하면 “murder”라는 단어 하나밖에 몰랐는데, 사실 사람을 죽였을 때 쓸 수 있는 영어 표현은 killing, murder, homicide, manslaughter 등으로 여러 가지이며 미국법상 제 각각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같은 단어 murder에 attempted가 붙으면 “살인 미수”가 되고, suspected가 붙으면 “살인 혐의”의 의미가 된다. 즉 전자는 살인의도를 가지고 범행을 저질렀으나 결과적으로 미수에 그친 경우이고, 후자는 살인행위는 있으나 즉 누군가가 살해되었으나 살인혐의를 받는 그 용의자가 진짜 살인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attempted와 suspected 둘 다 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영어단어이지만 법률 맥락에서는 의미하는 바가 이렇게 다르며, 각각의 경우에 발생하는 법적 효과 역시 다르다. 단어 하나로 한 사람의 유무죄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짜릿함을 느끼기까지 했다. 이렇게 통역대학원 시절 문화예술 번역, 산업경제 번역, 과학기술번역 등 다른 번역 시간에 접했던 것들과는 법률번역이 확연히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번역한 글이 읽힘으로써 끝나는 다른 문서와는 달리 법률문서는 실제 적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통역 교수님들로부터 법정 통역 경험담을 들은 기억이 난다. “네, 그렇습니다.”라는 증인의 대답을 영어로 옮기는 데 있어 긍정의 정도 차이에 따라 많게는 8가지의 “Yes.” 가 있다는 걸 들었을 때에는 신기하긴 했지만 크게 와 닿지는 않았는데, 연구원에서 일을 하면서 그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분야에 비해 법률 통역 및 번역은 통번역사가 감수해야 하는 위험부담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많은 통역사들이 선호하는 분야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점점 이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만 갔다.


연구원에서 일을 한지 한 달 반쯤 되었을 때, 브라질에서 발표를 성공적을 마치고 돌아오신 검사님께서 “다혜 씨, 방콕 가서 일할 생각 있어?”하고 물어보셨다. 당시 형사정책연구원은 태국 방콕에 위치한 UNODC(유엔 마약범죄국)과 AsiaJust라는 이름의 공동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ASEAN 10개국과 우리나라가 포함된 아시아지역의 검찰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사법공조를 도모하고 검찰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대검찰청 소속 검사님 한분이 파견되어 일을 하고 계셨고, 그 일을 도울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그 자리의 후보로 올랐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것 아무것도 생각해보지 않고 무조건 가겠다고 대답해버렸다. 외국에 나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껏 신이 났는데 UN에서 일을 한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P-3 직급의 UN 정식직원으로 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류심사 등 시험을 통과해야 해서 영문 C.V.부터 시작해서 지원절차대로 준비를 했고 최종적으로 


UN에 가게 되었다!


통역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은 뒤로 막연하게 UN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자주 했지만, 한국어가 UN 공식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UN 통역사가 되는 것은 포기해야겠구나 하고 마음을 접고 어릴 적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기회가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내게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당시 법무부 국제형사과 과장님과 일 때문에 자주 만나시던 형사사법센터 센터장님(법무부 면접에서 나를 스카우트해오신 분)은 종종 그 과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나와 그때 시험에서 1등 했던 다른 통역사 얘기를 하신다고 했다. 그때 내가 만일 그 통역사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점수를 받아 국제형사과로 갔더라면, 이 once in a lifetime chance가 내게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래서 어른들이 사람일은 모른다고 하나보다. 그 면접 때 이미 심신이 많이 지쳐있던 상태였고, 면접을 보러 다니던 초기에 비해 열정이 많이 식어있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마음을 다잡아가며 번역, 통역 시험 그리고 면접에서 최선을 다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기회가 될 때마다 학생들에게 해주며 어떤 자리에서든 일단 최선을 다하고 오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도 내 경험상 그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당시 방콕에선 과격한 반정부 시위가 한창이었고, 하루에도 사망자가 수십 명씩 발생하던 때였다. 방콕에 사는 한국사람들도 죄다 한국으로 피신을 오는 마당에 그렇게 위험한 지역 한가운데로 일을 하러 간다고 하니 가족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것도 UNESCO(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나 UNESCAP(유엔 아시아 태평양 경제 사회위원회) 같은 기구였다면 그 이름이나마 안심을 시켜줬을 텐데 그것도 아니고 아시아지역의 조직범죄, 마약범죄 등을 다루는 UNODC(유엔 마약범죄국)으로 간다고 하니 가족들의 걱정이 더했던 것이다. 온 가족들이 모여 앉아 가족회의를 했는데, 내가 영국으로 유학을 갈 때 공항에서 눈물을 보이신 이후로 엄마는 그때 두 번째로 눈물을 흘리셨다. 걱정을 끼쳐드리는 건 죄송했지만, 나는 영국에서도 너무나 좋은 경험을 많이 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내 마음은 걱정이나 두려움보다는 또 다른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 발령은 5월이었지만, 방콕 현지 상황이 너무 위험해 UNODC에서 입국시기를 미루는 게 좋겠다는 메일이 오기를 여러 번, 결국 6월이 되어서야 드디어 방콕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법과 영어 연구소 아우디오 랩]

https://www.instagram.com/audiolab.chl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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