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우울증 환자라고 해도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병원에서 정식으로 진단명을 받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다만 우울감이 때때로 찾아온다는 나의 증상에서 막연히 스스로를 우울증 환자라고 여길 뿐이다. 정신과적 진단은 쉽게 내려지지 않는다. 정확하게 하자면 증상을 기반으로 몸의 병을 검사해 보고, 모든 가능성을 지워나가도 증상이 설명이 안 되면 정신과적 진단을 고려하는 식이다. 거기에 증상이 비슷해 보여도 다른 질병으로 구분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보니 의사가 오랜 기간 관찰한 뒤에 진단을 내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한다.
정신과에서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약을 먹은 지 일 년이 넘어가지만, 나는 아직 나의 진단명을 모른다. 운이 좋게도 정신과를 방문한 지 약 두 달 만에 맞는 약을 찾았다. 약의 효과 덕분에 힘을 내어 대학원 졸업도 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고 있다. 약을 먹은 덕분에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더불어 어디에 나의 상태에 대해 정신과적 소견을 제출해야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의 정식 소견은 알지 못한 채로 스스로 우울증 환자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런 짐작이 아주 쓸모없지는 않다. 꼭 우울증 환자가 아니어도 어찌 되었든 스스로 정신적으로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임을 떠올리는 데 사용한다. 나는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우울증 환자라는 점을 떠올린다. 그런 상태에서는 셀프 쓰담 양식으로 전환한다. 우선 아무런 맥락 없이 누워서 시간을 죽이는 데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으려고 한다. 나를 억지로 끌고 가면 안 된다는 점을 떠올리고, 지금 우울한 기분과 지친 기분을 우선 인정해 준다. 스스로를 보듬으며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시간이 아직 낮이라면 약을 조금 더 먹는다. 저녁에 먹으면 잠을 못 자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진통제를 먹는다. 우리가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뇌에서 활성화되는 부분은 신체적 고통을 겪을 때 활성화되는 영역과 비슷하다. 그래서 신체의 고통에 쓰이는 진통제를 기분이 우울할 때 임시방편으로 사용할 수 있다. 기분 좋은 향을 맡으며 기분을 전환하기도 한다. 유칼립투스와 페퍼민트 같이 시원한 향과 레몬그라스같이 상큼한 향을 좋아한다. 진통제를 먹고, 좋아하는 향기를 맡으며 잠시 기다리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기기도 한다.
나에게 맞는 약을 꾸준히 먹더라도 상태가 안 좋은 날은 때때로 찾아온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겨울에 유독 힘들어한다. 생일을 앞두고 힘들어하기도 하고, 생리 전 증후군으로 힘들어하기도 한다. 환절기에는 널뛰는 날씨에 쉽게 지치고, 내가 감기에 걸려서 힘든 건지 아니면 정신과적 증상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우울할 이유는 언제나 있는 듯하다. 상태가 좋지 않으면 나는 습관적으로 이유를 찾는다. 처음에는 이유를 찾으면 내 상태를 다시 좋아지게 만들 방법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원인을 찾는다고 해서 꼭 나아지는 방법이 명확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내 기분에 좀 더 집중한다. 원인을 찾기보다는 내 기분을 스스로 알아주는 게 기분이 나아지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