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낮 동안의 분주함이 사라지고 찾아오는 차분함 속에서, 서늘한 밤공기를 느끼며 별을 바라보는 순간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 시골에서는 별이 쏟아질 듯 은하수가 펼쳐진다고 하지만,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그런 광경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과학 수업을 통해 밤하늘에 대해 조금씩 배우게 되었다. 달의 위상 변화부터 태양계의 행성들, 대표 별자리에 이르기까지, 밤하늘은 별뿐만 아니라 금성, 목성, 토성 같은 행성들로도 빛났다. 이들 행성과 달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지만, 별들은 핵융합을 통해 스스로 빛을 발한다. 북극성처럼 빛이 800년을 여행해야 우리에게 도달하는 별도 있다.
별들이 항상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빛을 낼 것만 같았지만, 별에도 수명이 있다는 사실은 사뭇 새로웠다. 인간의 수명에 비해 매우 길기는 하지만, 별들의 세계에도 생명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삶의 단계가 존재했다. 별이 질량에 따라 각기 다른 삶의 단계를 거치는 것은 마치 인간의 인생과도 비슷해 보였다. 태양과 같이 질량이 작은 별은 조용한 죽음을 맞이한다. 태양보다 몇 배 무거운 별은 화려한 초신성 폭발로 죽음을 맞이한다.
물리 장난감으로 이해하는 초신성 폭발
<김범준의 물리 장난감>에 소개된 '아스트로 블라스트(astro blaster)'는 초신성이 어떻게 그토록 강력한 폭발력을 내는지를 설명하는 장난감이다. 사실 어릴 적에 별의 생애를 배울 때에는 어째서 초신성 폭발이 그렇게나 대단한 위력을 가지는지 와닿지 않았다. 심지어 탄성이 뛰어난 농구공조차 처음에 떨어트린 높이보다 더 높게 튀어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별이 죽음을 맞이할 때에는 물질들이 부딪히며 사방으로 흩어지는걸까?
아스트로 블라스트는 막대에 크기와 무게가 다른 공 네 개가 순서대로 꽂혀있는 장난감이다. 가장 아래에 크고 무거운 공이, 그 위에는 그 다음으로 크고 무거운 공, 그리고 가장 위에는 가장 가볍고 작은 공이 꽂혀있다. 가장 무거운 공이 땅에 먼저 닿도록 장난감을 떨어뜨리면, 가장 위에 있는 작고 가벼운 공이 쏜살같이 튀어오른다. 막대에 꽂힌 공들이 연쇄적으로 충돌하면서, 가장 작은 공에 솟구쳐 올라갈 추진력을 제공한다.
마치 무거운 야구 방망이로 작은 야구공을 때리면 야구공이 저 멀리까지 날아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아스트로 블라스트의 무거운 공이 두 번째로 무거운 공을 때리면 두 번째 공은 원래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튀어오른다. 두 번째 공이 세 번째 공을,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공이 네 번째 공을 때리면, 애초에 아스트로 블라스트를 떨어트렸던 높이보다 훨씬 더 높이까지 작은 공이 튀어 오른다.
별이 폭발할 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별의 중심부에는 철과 같이 무거운 원소들이 자리잡고 있고, 표면으로 올라올수록 조금씩 가벼운 물질들이 자리하고 있다. 별의 가장자리에는 수소처럼 가벼운 원소들이 존재한다. 다양한 무게의 원소들이 별의 중심부로 떨어지면서 연쇄적으로 충돌하면, 가벼운 물질들을 저 멀리까지 날아가버린다.
사실 이렇게 글로 설명하는 것 보다 직접 아스트로 블라스트를 땅에 떨어트려보면 단박에 이해가 된다. 초신성 폭발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다. 하지만 아스트로 블라스트의 진정한 매력은 단순히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아스트로 블라스트를 바닥에 떨어뜨릴 때마다,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작은 공을 눈으로 좇느라 바빴다. 초신성 폭발이 어떤 과학적 원리로 일어나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너무나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물리 '장난감'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계속해서 바닥에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물리 실험 대신에 물리 장난감
실험이 과학 발전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는 실험 수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차이,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로 인해 실험 결과가 이론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실험이 잘 되면 그것대로, 실패하면 그것대로 문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실험 자체가 재미없었다.
실험은 귀찮고 번거로운 과정이었다. 변수를 통제하며 여러 번 결과를 측정하고, 그 측정값을 의미 있게 분석해야 했다. 실험이 끝나면 실험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보고서에는 실험의 배경, 목적, 결과 분석 등이 포함되어야 했다. 아무리 실험이 재미있다 해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 즐거움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난감은 그런 부담이 없다. 그저 가지고 놀면 된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물리 원리를 몸소 느낄 수 있다. 설명을 듣거나 상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직접적인 체험이 가능하다. 이런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으며, 재미도 있다.
장난감은 보통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물리 장난감은 어른들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원리를 이해하면 더 재미있지만, 원리를 모른다고해도 가지고 노는데에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실험은 싫어했을지언정, 물리 장난감은 싫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물리를 어렵게 느낀다. 사람마다 몇몇 과목을 어렵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유독 물리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벽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이런 물리 장난감이라면 마음의 벽을 조금은 허물 수 있지 않을까?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보면, 물리가 어렵기는 해도 싫지는 않아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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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노다해(https://linktr.ee/dahae.roh)
대학원에서 통계물리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Engineers and Scientists for Change)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과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단법인이다. 주로 회계/세무를 담당하지만, 사무국 규모가 작아 거의 모든 일에 손을 대고 있다. 부캐로는 과학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한다. 과학 강연, 과학 글쓰기, 과학책 번역을 하고, 과학 타로도 만든다. 과학과 과학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 <끝나지 않는 글쓰기> 매거진은 글쓰는 사람들의 연대인 '글쓰기 네트워크'로 연결된 작가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연재하는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