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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4 버티컬 마우스

by 노다해

지금 쓰는 키보드는 무려 20만 원이나 하는 고오급 키보드이다. 일 하기 싫고 기분이 좋지 않다가도, 이 값비싼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는 한다. 이렇듯 기계식 키보드가 나의 마음의 평화를 지켜준다면, 버티컬 마우스는 나의 손목 건강을 지켜준다. 손가락 관절이 아파 기계식 키보드에 입문하게 되었 듯, 버티컬 마우스는 손목이 아파 입문하게 되었다.


원인은 복싱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손목을 보호해 주는 기다란 천, 일명 핸드랩을 제대로 감아주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여러 종류의 운동을 잠깐씩 하다가 그만두었었는데, 복싱도 그중에 하나였다.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몸을 좀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연구를 하면서 쌓인 답답한 마음을 날려줄 운동이면 더더욱 좋았다.


문득 머릿속에 복싱이 떠올랐다. 복싱은 하다가 그만둔 적이 많았다. 20대 초중반 대학에 다닐 때에는 방학에 체력을 길러보겠다고 복싱을 등록했다. 그러다가 방학이 끝나면 수업을 들으러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복싱을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대학원생에게는 방학이 없다. 방학이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각종 학회 발표 준비와 연구 등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대학을 다닐 때와는 다르게 쉬는 기간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는 좀 꾸준히 복싱을 다녀보려는 마음이었다.


복싱을 할 때에는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기다란 천을 손에 둘둘 감아준다. 복싱을 배우러 가면 바로 이 핸드랩을 어떻게 손에 감는지부터 배운다. 그런데 이게 영 귀찮은 일이다. 애초에 천이 잘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천이 자꾸 꼬여서 감기가 불편하다. 게다가 천이 길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놓으면 자기 혼자 꼬이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다란 천은 언제나 돌돌 말아두는 것이 좋다. 손에 핸드랩을 감으면서 운동을 시작하고, 손에서 핸드랩을 풀어 잘 말아두면서 운동이 끝난다. 아, 물론 운동이 끝나고 땀에 절은 핸드랩을 빨아서 다시 말아두기도 해야 한다.


대학생 시절 복싱장을 다닐 때에는 이 과정을 착실히 반복했다. 그런데 대학원생이 되어 다녀본 복싱장에서는 핸드밀 대신에 목장갑을 껴도 괜찮다고 했다. 안 그래도 핸드랩을 감는 일이 너무나도 귀찮게 느껴졌던 터라, 목장갑을 끼고 복싱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안일하게 치부할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한 달 정도는 문제없이 복싱을 했다. 그런데 두 달이 되어가니 손목이 아파왔다. 정형외과를 가보니 복싱을 쉬라고 했다. 손목 근육에 충격이 가해져서 그렇다고 했다. 다시 손목 보호를 제대로 하고 복싱을 하기 전에 우선 복싱을 쉬고 손목을 회복하는 게 먼저라고 했다. 이번에는 좀 오래 다녀보려 했건만, 이번에는 나의 게으름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복싱을 그만두었는데도 손목이 여전히 아팠다. 왼쪽 손목은 많이 나았는데, 오른쪽 손목이 문제였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오른손으로는 마우스를 조작했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동작이 손목에 안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으니 그냥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손목이 안 좋아지자, 일반적인 마우스는 손목의 통증을 악화시켰다.


그렇게 손목에 부담이 덜하다는 버티컬 마우스를 구입했다. 버티컬 마우스를 쓰기 시작하자 복싱을 그만두어도 남아있던 손목 통증이 서서히 나아졌다.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이제 오히려 일반적인 마우스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버티컬 마우스로 내 손목 건강을 지킨다고 생각하니, 그런 건 참을만한 불편함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그래도 조금의 변화로 손목이 나아졌다는 점이다.


복싱 글로브와 핸드랩은 미래의 나를 위해 집 한편에 고이 모셔놓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복싱을 하게 되면 핸드랩을 잘 말아주어야지.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복싱뿐만 아니라, 다른 일상에서도 마땅히 지켜야 할 절차나 안전 수칙에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경각심이 생겼나. 귀찮다는 이유로 넘어갔다가, 손목과는 다르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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