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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3 기계식 키보드

by 노다해

도독도독. 내가 가진 기계식 키보드에서 나는 소리이다. 지금 집에서 쓰는 키보드는 20만 원이나 하는 거금을 들였다. 이 비싼 키보드를 두드리면 부드러우면서도 포근한 느낌이 들고, 키보드 위를 굴러다니는 손가락이 호강하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한 층 더 좋아진다. 역시, 기계가 비싼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살면서 키보드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아니다. 사실 키보드에 따로 관심을 가질 일도 딱히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에는 가족 공용 데스크톱을 쓰거나, 대학에 진학해서는 부모님이 사주신 노트북으로 과제를 했다. 대학원 연구실이나, 졸업 후 취직했던 사무실에서도 내가 쓸 데스크톱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키보드를 내 편의대로 맞춰서 쓸 일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사무실에서 타자를 치다 보면 손가락 관절이 아파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써 온 노트북의 키보드는 애플의 나비식 키보드로, 불편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 키보드로도 몇 년 동안 무리 없이 타자를 쳐왔던 손이었다. 각종 보고서와 논문을 쓰고, 프로그래밍 코드를 짜고, 온갖 글모임의 글을 썼어도 손가락 관절이 아픈 일은 없었다.


대학원에 비하면 타자를 칠 일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던 직장에서 키보드를 치다가 손가락 관절이 아프다니. 사무실에서 쓰는 키보드가 내 손에 맞지 않거나, 아니면 내 손이 이제는 노화를 맞았거나, 이래 저래 추측을 해보았지만 정확한 원인을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내 손가락에게 조금은 좋은 일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기계식 키보드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처음부터 키보드에 20만 원이나 하는 거금을 들일 생각은 아니었다. 내가 처음으로 내 돈 주고 구매한 키보드는 5만 원짜리 가성비 키보드였다. 처음에는 5만 원 짜리도 너무 만족스러웠다. 사무실에서 일하기 싫다가도, 키보드의 경쾌한 타건음을 들으며 하나둘씩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나아져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키보드에 돈을 쓰는 거였어’, ‘역시 인생에는 좋은 아이템이 필요해’라며 5만 원의 효용을 마음껏 누렸다.


그렇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한 번 기계식 키보드에 입문하고 나니 더 좋은 키보드를 써보고 싶어졌다. 게다가 사무실에서 좋은 키보드를 써보니, 그동안 무리 없이 쓰던 노트북 키보드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좋은 키보드에 눈을 뜨고 나니, 5년이 넘도록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노트북의 키보드가 이제는 왜 그리 욕을 먹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렇게 지금의 키보드를 지르게 되었다.


사실 결제 버튼을 누르기까지 몇 번을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나 자신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라는 핑계까지 만들어내며 최종 결제를 마쳤다. 우연히도 마침 그때가 내 생일 언저리였지만, 정말 사고 싶었다면 어떤 이유든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다행히도 노트북은 무사히 집으로 배송되었다. 역시 5만 원짜리 보다는 20만 원짜리가 더더욱 좋았다.


좋은 키보드로 타자를 치니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기분이 좋아졌고, 이미 기분이 좋을 때는 기분이 한 층 더 좋아져 손가락이 키보드를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비싼 키보드로 타자를 치고 있다. 글이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에도 몽글몽글한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며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받을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넬 수 있게 된다. 문득 인생을 살아가며 겪는 다른 스트레스도 기분 좋은 요소 한 가지만 있다면 이렇게 풀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고수는 장비를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뉴비이거나 쪼렙(초보 레벨) 일수록 장비가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서른 살의 나이를 먹으며 몸은 조금씩 노화를 맞이하고 있지만, 이 세상의 풍파를 견디는 데에는 아직 여전히 초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100세 시대라는데, 앞으로 살아갈 날이 70년이나 남아있다. 그러니 앞으로는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장비의 힘을 빌려 이 험난한 세상을 잘 헤쳐나가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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