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이, 그대에게 최악의 기억을!

by 하늘을 걷는 여자


두 번째 걸음

딜레이



“딜레이, 어떻게 생각해?”


딜레이는 될 것 같은 이상한 기운이 돌면
“제발 지금 나한테 일어나지 마라....... 제발.. 제발...”이 생각뿐이었어.


-동기 S 日



instagram @haley_p0717



승객들이 딜레이에 질색하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승무원들은 딜레이를 질색한다. 비행기에서 내려야 비로소 ‘퇴근’인 승무원들에게 ‘연장 근무’가 결코 반가울 리 없는 법.

뿐만 아니라 딜레이가 되면 승객들의 예민도는 자연스레 수직 상승한다. 두터운 화장을 지워내는 것보다, 발을 조이는 뾰족구두를 벗어내는 것보다 승무원들이 비행기 정시 도착에 간절한 이유이다.

이런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 불의의 상황이 닥쳐 비행 일정이 딜레이가 되면 그때부터 승무원들은 두 배로 바빠진다. 원 착륙 시간의 꼬리라도 잡아보고자 보이지 않는 사투가 시작된다. 공항에서 짐짓 여유로운 걸음으로 캐리어를 끌고 가던 그네들은 기내 입성과 함께 발에 땀이 나도록 뛰기 시작한다. 지면에서의 모든 준비과정을 재빨리 마친 후 빠르게 승객 탑승을 시작하여 비행기가 최대한 빨리 이륙 사인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본인의 듀티에 따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동료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수면 위 고고한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 열심히 물갈퀴를 휘젓고 있는 모습이 딱 이런 모습일까 싶다.





그 날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시리게 추운 겨울날이었다. 당시 나는 객실 듀티를 배정받았다. 기상 악화로 인해 인천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 시간 반 가량이 딜레이 되어 있었다.

승객 탑승이 시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의 승객이 어두운 표정으로 기내로 들어섰다.

‘어휴, 그럴 만도 하지. 틀어진 여행 일정은 어쩔꼬..’

되려 속상한 마음에 최대한 밝은 미소로 승객들을 맞이했다. 그때, 덩치 좋은 아저씨 한 분이 기내로 걸어 들어오셨다. 승무원 자리와 마주 보고 앉는 출구 좌석에 배정된 승객이었다. 좌석에 털썩 앉아 선글라스를 벚어젖힌 그는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를 불러 세웠다.


- 아니, 왜 이렇게 늦어?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는 짜증 섞인 반말이 귀에 둔탁하게 걸렸다. 참을 인(忍)을 새기는 속이 썼으나 딜레이가 되어 속이 상하셨을 것을 생각하며 상황을 설명드렸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갑작스레 눈이 내리는 바람에 날개에 결빙액을 도포하느라 이전 항편부터 비행기가 조금씩 딜레이가 됐거든요. 안전 비행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 조금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아니. 내가 상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데 그걸 탈 수 있냔 말이지.”


알고 보니 해당 승객은 20명의 여행객과 함께 탑승한 여행 가이드였다. 문제는, 그분들의 최종 목적지인 장가계로 무사히 환승이 가능하냐는 것. 승객의 발권 티켓을 확인하니 환승하기까지 약 한 시간 반 가량이 남은 상황이었다.

사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당시의 나는 애석하게도 비행 2회 차 ‘쌩신입’이었다. 지금에야 요령이 생겨 “손님, 이 정도 시간이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하고 너스레를 떨거나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을 테지만 당시 햇병아리 승무원은 규정을 벗어나는 법을 몰랐다.


“비행시간이 1시간 40분인데 도착해서 택싱 시간까지 합하면 약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될 예정입니다. 죄송하게도, 저희가 후속 비행에 대한 조치에 대해 받은 정보가 없어서, 환승하실 항편에 대해서는 상해에 도착하신 후 지상직원의 도움을 받으시면 됩니다.”


명쾌한 답을 듣지 못한 승객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항공 승무원이 책임지는 것은 승객의 안전과 기내 서비스일 뿐, 지상에서의 구체적인 상황은 기내에 전달되지 않는다. 회사 측에서 어떤 식으로 후속 조치를 취할지 알 수 없거니와 목적지 공항에서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예상할 수 없기에 승무원의 대답은 항상 모호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사무장마저도 비행기가 목적지에 다 와갈 즈음 혹은 도착한 후에야 후속 상황을 알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한낱 신입 승무원이었던 내가 알 턱이 있을까. “아니, 그걸 대답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해. 내가 탑승할 뒷 항편에 연락해서 늦게 출발하라고 하든지, 비행기가 도착하면 다른 승객들은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방송을 해. 우리 팀이 먼저 내리게.” 네? 아니, 이게 무슨 말씀? 어떻게 이런 참신한 발상을?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혹 지금 전용기를 탄 것으로 착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닐까. “죄송합니다, 손님. 그렇게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항편 후속 조치에 관한 소식을 전달받거든 바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다음 업무를 위해 돌아섰다. 아무래도 오늘 비행, 쉽지 않겠구나. 승객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승객 탑승이 끝나고 비행기 문을 닫았다. 한숨 돌리고 승무원 좌석(이하 점프싯)에 앉아 이륙 사인을 기다리며 창 밖을 바라봤다. 싸릿 눈이 정처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항편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출구 좌석 승객이 이때다 싶었는지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동방항공 이 썅년들...”으로 가뿐히 시작하여 수도 없이 날아드는 쌍시옷들과 ‘새끼’를 부르짖는 그 커다란 목소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화가 났다. 그리고 무서웠다. 어떻게 사람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사람의 마음을 죽이는 말을 내뱉는 것인가.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피할 수도 없었다. 이미 이륙 싸인이 켜진 후였다. 꼼짝없이 발이 묶인 채 언어폭력에 그대로 노출된 나는 속수무책으로 멍이 들어갔다. ‘난 지금 아무것도 안 들려, 괜찮다, 난 괜찮아.’ 관찰창 너머를 바라보며 연신 속을 달래고 어처구니없지만 양도 세어보았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달려드는 모진 말들에 아차 할 틈도 없이 손등으로 눈물이 똑 떨어졌다. 스무 살을 넘긴 이후로 육두문자 섞인 상스런 말을 남에게 들어본 적이 과연 얼마나 있던가. 생경한 충격에 찢어진 마음 틈새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당황스러웠다. 분명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오는 기이한 경험이란. 혹 이 모습을 다른 승객들에게 들킬세라 코감기에 걸린 척을 하며 연신 몰래 눈물을 닦아냈다. 기내의 안전을 책임지는 전문 인력이 아니라 코 흘리개 어린이처럼 비칠 것만 같았다. ‘뚝 그쳐, 별거 아니야. 그만 울자. 쓰레기를 집으로 가지고 들어오지 말자.’ 내가 죽자 사자 수도꼭지를 잠가보려 고군분투하던 그 시각, 해당 승객은 몇 분간 신나게 욕을 뱉어내다가 제 풀에 지쳤는지 다리를 쭉 뻗은 채 그대로 곯아떨어져 있었다. 이읔고 비행기가 안전고도에 진입했다. 서비스 준비를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뒷 갤리로 향했다. 눈물은 모조리 닦아냈다. 그리고 웃었다. 웃어야 했다. 내 감정이 공의 영역에 닿아서는 안된다 생각했다. 나는 지금, 웃는 게 맞았다. 다가오는 나를 미소로 반기던 동기 언니는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너, 무슨 일 있었지?” 헉. 방심하고 있던 옆구리를 찌르는 한 마디. 분명 다 울었는데, 걱정 섞인 한 마디에 가짜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이내 달싹거리며 울상으로 변해버렸다. “내가 다 준비할게. 가서 마음 정리하고 와, 괜찮아.” 동기언니에게 등 떠밀려 화장실로 들어섰다. 참았던 한숨이 깊은 곳에서 밀려 나왔다. 거울 속 나를 바라봤다. 시뻘건 토끼눈에 눈 아래 번진 마스카라가 아-주 봐줄 만했다. 화장을 고치며 마음을 다잡았다. '악한 사람이 하는 악한 말에 기죽지 말자. 내가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거다.'화장실에서 나와 갤리로 향했다. 젠틀하게 대해 주시던 다른 승객들을 위해서라도 더 신나게 웃으며 서비스를 시작했다.




모든 서비스가 끝나고 착륙할 시간이 되어 다시 점프싯에 앉았다. 심통난 아저씨는 무어라 무어라 혼잣말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비행기가 상해에 무사히 착륙했다. 승객 하기를 돕기 위해 통로에 서있는데 출구 좌석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승객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아버지 나이께로 보이는 남성 승객이었다. “일, 많이 힘들죠?‘ 예상치 못 했던 자상한 한 마디. 목이 메어왔다. 아니, 오늘 눈물샘이 고장 난 거야 뭐야. 대답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다 아차 하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우는 모습을 보신 듯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참 많아요. 이런저런 사람들도 많고.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힘내시고.” “네.... 감사합니다” 올라오는 감정을 삼키며 간신히 대답을 해냈다. 민망한 기분을 떨쳐내고자 승객에게 짐짓 밝은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여행으로 방문하셨습니까?” “아뇨, 저는 사업차. 내일모레 돌아가요.” 내일모레 돌아가시는구나, 생각하는데 어라? 그 날은 나 또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무슨 항편으로 돌아가시나요?” “저는 5051이요.” “와, 선생님 그거 제가 타는 비행기예요! 내일모레 또 뵙겠네요!” “하하하, 그래요? 그것 참 신기하네. 그럼 그때 또 만나요. 기운 내시고.” 앞서가는 승객들을 따라서 선생님은 유유히 통로를 빠져나가셨다. 서계시던 자리에 뜨듯한 기운을 그대로 남긴 채로.

감사했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위에 뜻밖에도 또 다른 누군가가 건넨 반창고가 붙었다. 아, 이래서 한 마디 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고 전해 온 것인가.




이틀 뒤,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편. 승객 맞이를 하는데 기다렸던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업무는 잘 보고 돌아오셨냐고 아는 체를 하니 선생님은 그때처럼 허허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셨다. 이륙 후 있는 물품, 없는 물품을 모두 모아 선생님께 선물했다. 감사의 마음을 담은 작은 쪽지와 함께.





딜레이는 승무원에게 최악의 순간을 선사하곤 한다. 감사하게도, 내게는 최악으로 남을 뻔했던 기억을 건져내어 먼지까지 탈탈 털어내 주신 ‘반창고’ 선생님이 계셨다. 훗날 반창고를 뗄 즈음엔 새살이 돋아 있겠지. 천재지변으로 인한 딜레이는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 밖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객이 그렇듯 승무원들도 그 순간들이 몹시 애가 타고 서럽다. 부디 미래의 승객들이 승무원을 향한 노여움을 조금만 걷어내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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