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의 슈퍼맨

by 하늘을 걷는 여자

세 번째 걸음

수영




“수영 수업, 어땠어?”


말도 마, 그 날 돌아와서 그대로 뻗었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몰랐으니 했지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난 못 해.

-동기 L




국내 항공사들과 달리 동방항공은 면접 항목에 ‘수영’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수영 테스트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다. 수영 테스트가 없는 대신 실전 수영이라는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다. 수영은 교육생 시절 수강하게 되는 탈출 수업의 한 항목으로, 모든 항목 가운데 단연 화룡점정으로 꼽힌다. 좋아서 화룡점정일까, 그럴 리가. 죽음의 화룡점정이다.



사실 나는 물 공포증이 있었다. 음, 정확히 몇 살 때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린이용 튜브 정도는 낭낭히 탈 수 있는 나이 즈음이었으니까 여서일곱살 즈음이었을까. 친척들과 다 함께 해수욕장을 찾았다. 다리 넣는 구멍이 뚫린 어린이용 튜브를 타고 파도를 즐기고 있던 꼬마 뒤로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삼촌이었다. 삼촌은 어린 조카와 친해지고자 장난을 걸어볼 셈이었겠으나 단언컨대 그가 택한 방식은 안 그래도 물을 무서워하는 어린 꼬마 아가씨에게 적합한 장난은 아니었다. 삼촌은 튜브를 그대로 들어 바다에 거꾸로 꽂아놓고 도망을 쳤다. 내가 잔뜩 물을 먹고 심통난 얼굴로 삼촌을 따라가리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문제는 당시 통통한 허벅다리가 튜브 구멍에 걸려 몸이 빠지지 않았다는 것. 수면 아래 물구나무 선 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뒤늦게 뛰어와 내 양 발목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려준 아빠의 얼굴을 본 순간 서러움의 눈물을 터트림과 동시에 생각했다. 앞으로 내 사전에 물놀이란 없다.


그 날 이후, 스무 살을 훌쩍 넘기도록 그 흔한 워터파크도, 수영장도 한 번 가본 적이 없다. 바다수영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얕은 계곡 정도면 물놀이는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제 발로 수영장을 찾았다. 승무원이 되려고. 아니, 승무원이 될 거라고 마음을 먹었는데 면접을 통과해도 수영 테스트를 봐야 한다니 별 수 있는가. 어느 쪽을 포기할까 잠깐 고민하기도 했으나 무럭무럭 커버린 오랜 두려움을 몰아내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아동용 풀장에서 숨 참기를 배우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작이 반이라고, 지금은 평영까지 거뜬히 해낸다. 무시무시할 줄 알았던 두(이름은 려움)씨 아저씨는 사실 어린 날의 꼬마, 그 모습 그대로 인 채 남아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물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어렴풋이 남아있다. 특히 바다 수영? 아서라, 여전히 엄두가 안 난다.





탈출 수영 수업 날, 모처럼의 야외 수업(?)에 달뜬 마음으로 수영장을 찾았다. 입고 온 수영복 위에 교육장에 준비되어 있는 해진 유니폼을 착용했다. 실전에 철저히 대비하기 위해 실제 상황처럼 유니폼을 착용하는 거라고. 채 마르지 않아 축축한 유니폼이 오소소 소름을 자아냈다. 간단히 준비운동을 마친 후 구명조끼를 착용까지 완료. 멀뚱이며 서 있는 우리를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시던 교관님은 뜻밖에도, 우리를 모형 비행기로 데려가셨다. 기내 탈출은 분명 나중에 한다고 하셨는데? 교육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내에 모두 탑승하고 나자 교관님은 기다렸다는 듯, 모형 비행기의 문 한쪽을 열어젖혔다.


大家,从这边跳进水中
(여러분, 여기서 물로 뛰어내리세요.)



아뿔싸. 알고 보니 그 문은 수영장과 맞닿아 있었고 탈출 수영은 실제 상황처럼 '입수'에서부터 시작이었다. 비행기의 뒷 문을 개방한 덕에 맨 뒤에 서 있던 나는 공교롭게도 첫 입수의 영광을 '떠'안게 되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입수대에 서 수영장을 내려다보았다. 발치 저- 아래서 넘실거리는 어둠은 두려운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입수대가 이렇게 높을 일이야? 물이 검은 것도 아닌데 바닥은 왜 안 보여. 물에 뛰어들어본 적은 없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온갖 잡생각이 몰려들었다. 굳은 표정으로 발발 떨며 입수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교관님이 툭 한 마디를 던졌다.


你也怕,旅客也怕
(네가 겁내면 승객들도 겁내)



아, 맞다. 나는 지금 여기 동기들과 웃고 떠들려고 온 게 아니다. 나태하던 정신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한 마디에 정신이 바로 섰다. 그래, 가보자. 지금은 비상상황인 거다.

삑! 입수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수영장에 울려 퍼졌다. 한 발을 앞으로 뻗은 채 입수대에 선 나는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꼬로로로로록.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던 몸이 구명조끼의 도움을 받아 수면으로 둥둥 떠올랐다. 푸하! 참았던 숨을 내쉬고 구명보트를 향해 팔다리를 내저었다. 생경한 모습으로 다시 만난 두씨 아저씨와 용감하게 '맞짱'을 뜬 내가 대견했다.




구명보트 탑승, 지휘, 그늘막 세우기, 구명보트 수리, 인명 구조 등 실전 연습이 끝나고 테스트 시간이 돌아왔다.

수영 수업의 하이라이트, 25m 5분 만에 5번 왕복 테스트. 구명조끼를 입고 보는 테스트였으나 오히려 구명조끼 때문에 물살의 저항이 심했거니와 앞선 수업들로 인해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인지라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재시험은 죽기보다 싫었다. 1초 전에 통과할지언정 무조건 성공해야 했다.

삑! 익숙한 휘슬 소리와 함께 열댓 명이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제한시간의 압박이 그 뒤를 쫓았다. 자유형을 하자니 구명조끼에 때문에 팔을 크게 들어 올릴 수가 없어서 배영으로 영법을 얼른 바꿨다. 천장을 보고 드러누워 어찌나 열심히 발을 굴렀는지, 마지막 바퀴에서는 목적지에 다 왔는지도 모르고 발을 구르다가 벽에 머리를 꽝 박아버렸다. 박치기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엄숙한 테스트장에 웃음이 터졌다. 물 밖으로 나와 아픈 머리를 손바닥으로 문대며 줄을 섰다. 물속에는 여전히 많은 동기들이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애들아 힘내!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1분쯤 남은 시점이었을까. 반환점 근처에서 헤엄을 치던 동기 한 명이 양 팔을 휘저으며 위아래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영 중이라 생각했는데 억, 억, 하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모두가 어라? 하고 있던 그 순간, 통역으로 참여하신 선배님 한 분이 넓은 수영장 반 바퀴를 돌아 동기가 있는 반환점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셨다. 수영장 바닥에 납작 엎드려 동기의 구명조끼 뒤편을 낚아챈 선배님은 타일 근처로 동기를 끌더니 흡, 하는 짧은 기합소리와 동기를 수영장 타일로 건져냈다. 동기는 컥컥 대며 물을 뱉어냈고 선배님은 신속하게 구명조끼를 풀어 동기가 정상적으로 숨을 쉬도록 도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거친 숨을 내몰아 쉬는 동기의 등을 두드리는 선배님을 지켜보며 입이 떡 벌어졌다.


와, 슈퍼맨이다....




알고 보니 수영이 두려웠던 동기가 구명조끼 복부 끈을 너무 세게 조여놓은 탓에 호흡 곤란이 온 것. 수영장 안의 한 명 한 명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선배님께서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조치를 취한 덕에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특히나 물에 푹 젖어 배로 무거웠을 사람 한 명을 건져 올려내다니. 눈 앞에 갑작스레 펼쳐진 인명구조 상황에 고장 난 로봇처럼 대단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멋있었다. 우리는 서비스인이기 이전에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던 교관님의 말씀이 가슴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지구를 26바퀴째 걷고 있는 현재까지, 다행스럽게도 인명 구조가 필요한 상황을 마주한 적은 없다. 물론 퇴사를 하는 그날까지도 절대 그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나에게도 '혹시'하던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 그 '혹시'를 위해 늘 비행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한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볼 때도 있다. '재수 없게 굳이 그런 생각을 하냐' 생각할까 어디에 얘기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언제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혹시, 아주 혹시, 훗날 몇 만 분의 일의 확률로 긴급 상황을 겪게 된다면 적어도 나는 두려움에 패배한 사람으로 남고 싶진 않다. 슈퍼맨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그날 이후, 안전에 관해서만큼은 비행이 쉬웠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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