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 승무원의 낯 뜨거운 실수

오겡끼데스까-!

by 하늘을 걷는 여자

네번째 걸음

실수


“창피한 실수 해본 적 있어?”


잘 잊고 있으니까 말 꺼내지마...
흑역사가 없을리 있냐


-동기 L



때는 2018년, 낯 뜨겁기 좋은 아주 뜨거운 여름날.

동기와 인천행 인바운드 비행을 마친 뒤 퇴근하는 길이었다. 김포공항역에서 내려 동기와 짧게 인사를 나눈 뒤 5호선 환승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길을 헤매던 일본 관광객 두 분이 난처한 표정으로 내 앞으로 불쑥 다가오셨다. 아무래도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니 공항 위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셨을 터, 두 분은 양 손을 열심히 휘저어가며 지하철이 달리는 모습을 표현하시더니 연신 “김뽀 에어포따! 김뽀 에어포따!”를 외치셨다.


아, 김포공항을 찾고 계시는구나!

싶어 영어로 길을 알려드리려 시도해봤으나 두 분은 그저 나를, 그리고 상대방을 연신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실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나는 ‘하잇! 와따시와 칸코크진데쓰’ 정도밖에 모르는 완벽한 일알못이었고 어쩔 수 없이 양 손 양 발을 휘저어가며 김포 공항으로 가는 방법을 설명했다. 두 분은 “Go downstairs! go downstairs!”외치며 아래쪽을 향해 콩콩거리는 나를 진지하게 살피시더니 이내 이해하셨는지 연신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혼또니 아리가또!”하고 기쁜 표정을 지으셨다.

바이 바이! 두 분과 신나게 작별인사를 하고 5호선 환승구로 향하는 길, 퇴근길에 좋은 일 하나 했네 싶어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기는데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 내가 뱉은 한 마디.

Go downstairs...?
나 지금 아래쪽으로 가라고 한 거야?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우리 항공사는 인천공항발 노선이 많아 인천 출퇴근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방금 전 인천공항에서부터 출발해왔던 나는 당연스럽게 그분들이 말하신 “김뽀 에어뽀따”에 자의적 해석을 팍팍 담아 인천공항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드린 것.

길을 잘못 알려드린 ‘나’ 때문에 항편을 놓쳐 허망해하는 두 분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는 동시에 뒷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한국 승무원이 길을 잘못 알려주고는 무책임하게 가버렸다고 생각하시겠지? 설마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시려나? 이게 다 혐일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었다.
뒤로 돌아 방금 전 내가 길을 알려드렸던 곳으로 무작정 달렸다. 두 분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또 한 번 무작정 가장 가까운 공항철도행 에스컬레이터로 달렸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에스컬레이터 끝에 낯익은 일본 아주머니 두 분이 두리번거리시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때 마침 인천공항으로 가는 열차 문이 열려버린 것...!

이 기막힌 타이밍에 잠시 실소가 터졌으나 내가 막아서야 할 두 분이 파도 같은 인파를 거슬러 열차로 향하는 모습에 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있었기에 짐을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뛰어내려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짐을 두고 혼자 뛰어내려 가자니 자칫 캐리어가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박한 그 찰나의 순간, 내 머릿속을 지배한 단 한 가지는 그분들이 열차를 타도록 내버려둬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 다급함이 불러낸 막무가내의 용기였을까. 올바른 일어를 구사할 수 있고 없고는 내게 중요치 않았다. 그저 두 분을 불러 세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아주 용감하게, 아주 큰 소리로 내뱉어버렸다. 내 흑역사를.


오겡끼데스까~!!!!!!!!!!!
오겡끼데스까아아아아!!!!!!



나를 돌아봐주지 않는 애석한 뒤통수를 향해 부끄러움도 잊은 채 연신 "오겡끼데스까!"를 외쳤다. 의도치 않게 공항에서 펼쳐진 러브레터의 한 장면에 사람들의 눈이 나와 내 시선 끝을 향했다. 다행히도 두 분은 열차 탑승 전 뒤를 돌아봤고 양 손으로 열렬히 X 자를 그리며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무사히 김포공항 국제선으로 가는 길을 설명해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가는 길.

방금 헤어진 동기에게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야기했다. 동기가 "야, 신입은 신입이다. 패기 넘치네!" 하며 포복절도를 하더니 내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이럴 수가. 내가 심지어 유니폼을 입고 사람 많은 곳에서 무슨 짓을 한 건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픽 터지는 동시에 볼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하, 지난주에 러브레터를 보는 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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