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없음에 감사할 때가 있다

와칸다 포에버!!!!

by 하늘을 걷는 여자


다섯 번째 걸음

감정




"비행하면서 대부분 어떤 감정을 느껴?”


새삼스럽게 무슨 감정은 감정,
그냥 일희일비하지 말자 생각하는 거지.



-동기 K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서는 늘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난다. 그 이야기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녹아있기 마련이다. 기쁨, 슬픔, 분노, 질투, 행복, 우울 기타 등등!

나는 직업상 매일 수십수백의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한다. 오늘의 새로운 주인공들은 내 인생의 한 페이지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어제와 다른 이야기를 써내곤 다양한 감정을 알게 한다. 오늘은 '허무한 안도'로 마무리된 하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장거리 비행 날이었다. 목적지는 엘에이. 이코노미 승무원이 감원된 덕에 이코노미로 내려온 '선택받은' 비즈니스 승무원들은 갤리에 모여 조용히 만세를 불렀다. 나 또한 그 영광스러운 1인으로 선정되어 함께 허공 박수를 쳤다.


승객 탑승이 시작됐다. 기분 좋은 시작이다. 기내로 들어서는 승객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좌석을 안내했다. 안내를 마치고 이코노미석 첫 열로 걸어가던 중, 기내로 걸어 들어오는 한 명의 승객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단정하게 정리된 곱슬머리에 반짝이는 흑빛 피부. 검은색 트레이닝 복을 멋스럽게 소화해내는 그는,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블랙 팬서, 채드윅 보스만이었다. 다가선 담당 객실 승무원에게 "옷을 좀 걸어주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는 그 젠틀한 모습은 익숙한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심장이 갓 건져 올린 활어마냥 펄떡 대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다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도 해보았으나, 당시 큰 사랑을 받았던 <어벤저스:엔드게임>의 주인공들이 상해에서 진행되는 무대인사에 참여하기 위해 동방항공을 이용했다는 글과 인증사진들이 동기들의 SNS에 심심찮게 보이던 때였기에 전혀 가능성이 없는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되려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이 차올랐다. 지금 내 비행기에는 블랙 팬서가 타있다!!!!!!!!!!!!






하. 지. 만 그 어떤 순간이든 우선순위는 존재하는 법. 승객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일단 체통 머리를 지키기로 했다. 좋아, 나도 비행 동안에는 내 구역 승객들에게 집중하고 하강 전 즈음에 살짝 사진 요청을 해보자. 블랙 팬서와의 인증샷을 생각하니 시키지도 않았건만 광대뼈가 천장으로 한껏 솟아올랐다. 행복한 상상에 도취되어 힘든지도 모르고 기내를 날아다녔다.



비행은 순조로웠다. 11시간이 후닥닥 지나 하강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반, 착륙 전 서비스를 모두 끝낸 기조들이 하나둘 갤리로 모여들었다. 근데 이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어벤저스는 중국에서도 분명 큰 사랑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블랙 팬서와 한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평온할 수가 있는가! 영화를 안 봤나? 아니면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피어나는 의구심에 견고했던 '확신'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확인이 필요했다.


"애들아, 근데 16L 좌석 탑승 승객, 블랙 팬서(Black Panther) 아니야?"


꿀꺽. 제발, 한 명이라도 알고 있어라.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꽂힌 것도 잠시, 기조들은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머리를 갸우뚱 대기 시작했다.


"블랙....? 그게 뭐야?"


아, 이럴 수가. 내가 이걸 간과했구나.

중국으로 수입되는 외국 영화는 제목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포스터가 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어로 번역된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그게 어떤 영화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인이 대다수였다. 애석하게도 나는 블랙 팬서, 어벤저스를 중국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몰랐고 사랑스러운 나의 동료들은 ‘黑猩猩,复仇者联盟’이 영어로 ‘Black Panther, Avengers’라는 것을 몰랐다. 갈수록 태산이라던가, 블랙 팬서 역을 연기한 배우의 본명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그거 있잖아, 원래는 박사인데 흥분하면 초록 괴물로 변해 으어어어! 하고. 막, 활 쏘는 사람도 있고, 그그 방패 들고 있는 대장도 있고!"


헐크로 변신했다가, 활을 쐈다가, 보이지도 않는 방패를 던지는 척까지. 진지하게 주접 부루스를 떠는 나를 보며 기조들은 스무고개 마냥 "정답!"을 외쳤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얻을 수 없었다. 곧 흥미를 잃은 기조들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16L 승객이 블랙 팬서가 맞냐고오오오!

이제 착륙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다른 방법을 모색해내야만 했다. 간절한 마음이 갖은 방법을 쥐어짜 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생각해낸 첫 번째 방법. 11시간을 함께하며 절친이 된 몇몇 승객들에게 블랙 팬서의 본명 얻어내기. 정보를 얻은 후, 성씨 서비스를 진행하는 비즈니스 아일 승무원에게 이름이 일치하는지 확인을 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승객을 확인하는 데에 있어서는 가장 안전한 방법임에 틀림없다. 당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출구 좌석 승객(외국인)에게 가장 먼저 달려갔다.


(*영어 대화이므로 편의상 반말체 사용)

"우리 약 한 시간 뒤에 목적지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야, 비행하는 동안에는 좀 괜찮았어?"

"응, 덕분에. 신경 써줘서 고마워."

"음, 근데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질문 하나 해도 될까?"

"응, 뭔데?"

"블랙 팬서를 연기한 배우의 본명을 알아?"

"아, 극 역할이 티찰라인 건 알겠는데 본명은 모르겠다."

"그렇구나, 대답해줘서 고마워!"


자못 아쉬운 마음에 승객 두어 명에게 더 물어보았다. 하지만 여행을 간다는 내 또래의 한국인 승객도, 미국에서 공부 중이라는 캐나다인 승객도 블랙 팬서의 본명을 떠올려내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으로 선택한 두 번째 방법. 담당 객실 승무원에게 묻기! 블랙 팬서가 뭔지 모르더라도 혹 그가 공인이라는 것에 대한 아주 조금의 낌새라도 느끼진 않았을까. 혹 그녀에게는 정체(?)를 밝혔을 수도 있다 생각하며 서둘러 비즈니스 갤리로 향했다.


"저 친아이더(친애하는 이를 부르는 말), 혹시 16L 승객 서비스하는 동안 어땠어?"

"아, 그 손님? 별스런 요구도 없고 되게 좋으셨어. 왜?"

"아니, 내 생각에는 그 손님이 유명한 배우인 것 같은데 확신이 없어서!"

"오 진짜? 나는 네가 말하는 배우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행 내내 손님이 보인 태도만 보면 정말 공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


듣고 보니 그는 친구의 사소한 행동에도 "Thank you"를 잊지 않는 '일할 맛 나게'하는 승객이었으며 태도, 말투, 표정 하나하나가 섬세했다고. 하지만 역시, 이 정도만의 정보만으로는 그의 정체를 확신할 수 없었다. 비즈니스 통로를 지나 다시 이코노미 클래스로 돌아오며 아닌 척 슥, 승객을 살폈다. 아무래도 블랙 팬서가 맞는 것 같은데 '그놈의 확신'이 없었다.


갤리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미친 척하고 승객에게 다가가 팔로 엑스자를 그리며 "와칸다 포애버!!!!!"를 외쳐볼까?' 내 왼쪽 어깨에 앉아있던 요정이 말했다. "가,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어. 얼른 늦기 전에 가보라고!" 그에 질세라 오른쪽 어깨 위 요정이 나를 타일렀다. "아냐, 만약에 블랙 팬서가 아니면 어떡할 거야. 일반 승객도 아니고 승무원이 뭐? 와칸다 포애버? 너만 미친 사람 되는 거라고!"


출처 wikitree

한참을 요정들과 함께 오락가락하고 있던 그때, 띠디딩- 하는 소리와 함께 하강을 알리는 안전 검사 방송이 시작됐다. 도착 정보를 알리는 경쾌한 목소리가 '이미 네 기회는 날아갔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호텔로 들어섰다. 이런 절호의 찬스를 놓치다니. 아쉬운 마음에 비행 내내 궁금했던 블랙 팬서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그토록 알고 싶던 그의 본명은 채드윅 보스만이었다.



채드윅 보스만, 채드윅 보스만.....?
응? 비즈니스 친구가 알려준 해당 승객의 성씨는 분명 캐드릭 뭐였는데.


멍-한 감정도 잠시, 이내 푸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본인도 아닌 본인을 모셔 두고 11시간 동안 그렇게나 성실하게 북을 치고 장구를 쳐대다니. 간절한 마음에 "와칸다 포애버!!"를 외쳤을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 "으악!!!!!!!!!!!"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끔찍했다. 상상만으로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순간, 용기를 내지 않아 준 내가 무척이나 대견했다.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허무한 안도와 함께 그 날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가끔은 새로운 이야기가 나를 분노하게도 울게도 한다. 하지만 이래나 저래나, 새롭게 피어나는 이야기는 처음 마주한 이름 모를 꽃처럼 늘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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