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얼굴, 런던
런던과의 인연은 보잉 기종을 실습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거리를 막 시작할 당시에는 유럽 비행이 얼마나 간절하던지. 비행 짝지와 나는 실습 비행지로 유럽이 나오길, 과장을 조금 더해 물을 떠놓고 빌었다.
기도가 하늘에 닿은 걸까. 실습비행지로 런던 항편이 배정된 것을 확인한 순간, 동기와 나는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런던에 도착한 당일, 동기 언니와 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근위병 교대식이 열리는 버킹엄 궁전이었다.
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은 오전 11시에 진행된다. 한 시간 전부터 운집하기 시작하는 관광객들.
근위병 교대식을 관람하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런던 시내였다. 런던 출발 전, 눈 빠지게 인터넷을 검색하여 찾아낸 뮤지컬, Dream girls!
17000보를 찍으며 런던에서의 첫 날을 마쳤다. 생경한 풍경 속, 환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들이 오늘을 말해주고 있었다.
영국에 가기 전 버킷리스트가 하나 있었다면 바로 노팅힐(notting hill)에 가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그랬듯, 정말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운 마을인지 두 눈에 직접 담아보고 싶었다.
날이 밝았다.
비행까지 남은 시간은 8시간. 피로고 뭐고 우리에겐 잠시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침 일찍 나섰건만 예상치 못하게 길을 좀 헤매었다. 처음엔 발을 동동 굴렀지만, 낯선 공간에서 만난 풍경들과 사람들에게서 전해오는 또 다른 감상은 우리의 발걸음에 여유를 더해 주었다. 이래서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건가.
노팅힐에서의 알록달록한 추억을 끝으로 런던에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1년 뒤, 오랜만에 런던을 찾았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대영박물관.
개인적으로 박물관, 미술관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지난번에는 함께 온 비행이었던지라 둘 모두의 취향을 고려하여 가지 못했던 그곳이었다.
하지만 꽤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대영 박물관에서는 큰 영감을 받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을 보는 기분이었달까. 야생에서 뛰놀던 본모습을 잃은 동물들이 생기 없이 박제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커다란 박물관을 두 시간 만에 뛰쳐나와버렸다.
약간의 침통함을 안고 무작정 걸었다.
출출함이 몰려왔다. 동기들에게 추천받았던 버로우 마켓으로 향했다.
배를 채우고 나자 푸르른 곳에서 바람을 쐬고 싶었다. 정말 의식대로 흘러가는 여행이구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정한 목적지는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왕립 공원, 세인트 제임스 파크. 버로우 마켓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버로우 마켓에서 산 납작 봉숭아를 친구 삼아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꽤나 많은 청설모가 풀밭을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사람을 전혀 겁내지 않았다. 되려 나를 향해 달려드는 모양새가 동네 깡패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한적한 그 모든 풍경들을 눈에 가득 담았다. 우울한 모습만 보여주던 런던이 곁을 조금 내준 느낌이랄까.
타워 브릿지를 마지막으로 마무리 지은 런던.
풀밭에 앉아 있던 고 40분을 못 참고 런던의 하늘은 웃고 찡그리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뭐, 우울한 런던만 알고 있는 그네들에 비하면 이 정도쯤이야. 행복했다.
한 달이든 일 년이든, 비행을 하는 이상 그게 어디든,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어떤 체류지에서든 마음이 급한 법이 없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이 마음을 오래오래 잊지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