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양보 부탁드립니다.

사회적 약자 그리고 옳음에 대한 믿음.

by 하늘을 걷는 여자


여덟 번째 걸음

사회적 약자




“비행기에서 만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누가 봐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먼저 도움을 드리는 게 맞지


-동기 L



사건은 샌프란 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발생했다. 일단 당시 탑승했던 보잉 777 기종 좌석 배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보자.

사건이 발생한 이코노미석 맨 끝, 73열은 좌석이 2-3-2로 배열되어있다. 좌석은 오른쪽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AC - DGH - JL 석이고 둘셋둘로 나뉜 좌석 사이에는 통로가 위치해있다. 그리고 좌석 뒤쪽으로는 승무원들이 이착륙 때 착석하는 좌석(이하 점프싯)과 갤리가 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던 비행의 시작에는 뜻밖의 복병이 숨어있었다.


승객 탑승이 시작되었다. 마흔대여섯 정도로 보이는 다부진 인상의 아시아계 아저씨 한 분이 객실로 들어섰다. 배정된 자리는 73D. 오버헤드빈에 가져온 짐을 올린 아저씨는 좌석에 앉아 좌석 앞 주머니에 꽂힌 잡지를 뒤적거렸다. 뒤이어 73JL 좌석에 배정된 중국인 노부부 뒷 객실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짐을 오버헤드빈에 올린 후 좌석에 앉았다. 둘은 들고 온 보온병에 담긴 물을 홀짝 거리며 객실로 부산히 들어서는 승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객 탑승이 끝나갈 무렵, 만삭의 여성과 그의 남편이 비행기에 올랐다. 그녀는 커다랗게 부푼 자신의 배를 감싸 안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배정된 좌석을 찾아 걸었다. 행여 그녀가 넘어지진 않을까, 그 뒤를 따르는 남편의 손은 그녀의 허리춤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 두 승객의 좌석은 73AC 였다.


이읔고 승객 탑승이 끝났다. 비행기 문을 닫고 다음 구령을 기다리는데 객실 뒤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중국 기조 두 명이 73JL과 DGH 사이의 복도에 서 있었다. 73J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가 방금까지는 일어서 계셨던 건지 도로 본인의 좌석에 착석하시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들었던 큰 소리는 뭘까 싶어 기조들에게 다가갔다. 난처한 표정으로 통로에 서 있던 기조들은 "왜?" 하며 다가서는 내 팔목을 낚아채고는 갤리로 향했다.


"왜, 무슨 일인데?"

"아니, 73D 승객이 이상해."

"왜? 뭐가 이상한 건데?"

"그게, 지금 73GH 좌석이 비었잖아. 할아버님이 할머니를 좀 편히 가게 하고 싶으셨는지 옆에 있는 H좌석으로 옮겨 앉으셨나 봐. 그랬더니 D 승객이 할아버지한테 원래 돌아가라고 그렇게 소리소리를 지른 거야. 자기가 세 좌석을 모두 사용할 거라나. 중국인인 줄 알았는데 중국어는 못 하고 영어를 쓰시더라고. 도무지가 말이 안 통해."


가만히 설명을 듣다 보니 기가 찼다.



아니, 그분은 빈 좌석에까지 전세를 냈대?




옆 좌석이 빈 것은 단순히 운이 좋은 상황일 뿐, 좌석이 비었다고 본인에게 해당 좌석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도 아닌데 그렇게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는 모양이라니.

11시간 40분의 장거리 비행이기에 당연히 두 분 모두 좀 더 편하게 가고 싶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실 할아버지께도 자리를 꼭 옮겨야 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을 놓고 다시 생각해봐도 D 승객의 행동은 분명 무례하고도 폭력적이었다.

어찌 됐건, 할아버지가 제자리로 돌아가시는 것을 끝으로 해당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갤리에 모인 기조들은 해당 승객을 항편 내내 예의 주시하자며 간략하게 브리핑을 마친 뒤, 제자리로 흩어졌다. 더 큰 시련이 다가오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비행기 이륙 전 안전검사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코노미 클래스 맨 앞 열부터 천천히 안전 검사를 시작했다. 이코노미를 반으로 나누는 중간 화장실을 지나 뒤편으로 발을 딛는데 엎치락 뒷치락 한 데 뭉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73D 승객과 73C에 앉은 남편이 서로의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근처에서 안전검사를 하고 있던 기조들은 화들짝 놀라 재빨리 73열로 향했다. 둘을 떼어놓고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방금 전과 아주 흡사한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만삭 아내가 좁은 좌석에 낑낑 대고 앉아있는 것이 못내 속상했던 남편은 73D 승객에게 혹시 이륙 후에 자신이 빈 좌석으로 좀 옮겨가도 되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73D 승객은 역시나 절대 안 된다며 어깃장을 놓았고 남편은 아내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조금만 양보를 해줄 수 없겠냐고 다시금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아주 가관이었다고.


That's your business.
그건 네 사정이고.



빵! 그 대답을 시작으로 우리가 목격한 상황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상황 설명을 들은 기조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 하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아니, 저런 인정머리 없는 X이 다 있나'

갤리에 모여 설명을 듣는데 비행기 이륙 사인이 켜졌다. 이 문제는 이륙 후 다시 해결을 해보기로 하고 일단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간 두 승객은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둔 채 팽팽하게 대치 상황을 벌였다. 남편이 D승객을 향해 말했다.

"이륙하고 나면 나는 무조건 빈 좌석으로 가서 앉을 거야."

D승객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렇게 해봐,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이윽고 비행기가 활주로를 딛고 하늘로 떠올랐다. 3분쯤 흘렀을까. 비행기가 상승하는 느낌이 약간 덜 해졌다 싶던 그 순간, 안전벨트를 재빨리 풀어낸 남편은 뒷 갤리 앞 복도를 쏜살같이 지나쳐 H 좌석으로 달려갔다. 그는 H 좌석에 안전벨트로 고정되어 있던 D의 배낭을 G석으로 옮기고는 그대로 H 좌석에 눌러앉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D는 순식간에 들이닥친 불청객에 당황하기도 잠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배낭을 남편에게 던지며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남편 또한 두 손으로 배낭을 막아내며 자리를 꿋꿋이 지켰다. 좌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작된 둘의 육탄전은 점점 가열 양상을 띄었다. 당시 뒷 열과는 거리가 먼 점프싯에 앉아 있었기에 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서로를 향해 쉴 틈 없이 날아가는 검은 배낭이 오늘 비행이 절대 쉽지 않을 것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안전 고도에 도달하자마자 73열로 쫓아갔다. 흥분한 승객들을 달래는데 뒷 갤리 사무장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갤리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사무장이 아이패드를 코 앞으로 들이밀었다. 73D 승객의 간단한 인적 사항(이름, 좌석, 성별)을 볼 수 있는 화면이었다.


"이 승객 이름 좀 읽어봐."

"승객 이름? 어디 보자, 승객 이름이 이, 각, 수.... 에? 이각수(가명)?"


아시아계인 것은 분명한데 중국어는 못 하는 걸 보니 중국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영어로만 이야기를 하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도통 알 수 없어 답답했던 사무장이 승객 정보를 찾아봤던 것이다.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이름을 보니 아무래도 한국인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제발 한국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는 마음이랄까. 사무장은 내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한국인 아닐까?"

"음, 아직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는 것 같아."

"그러면 네가 가서 한국어로 한 번 말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응, 내가 다시 한번 가볼게."



좌석으로 돌아가 보니 소식을 전해 들은 객실 매니저도 73열에서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여전히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난처한 표정의 매니저에게 내가 한 번 설득해보겠다고 귓속말을 전한 뒤, 안타깝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만면에 띄운 채 이각수 씨에게 다가갔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 여성분께서 지금 만삭이라 몸이 불편하니까 좌석을 좀 양보해줄 수 있으실까요?"

"아니, 내가 왜 그래야 해? 저 사람들이 애초에 배정받은 좌석은 A, C잖아. 너희 중국인이라고 지금 중국인 편만 드는 거 아니야?"

"손님, 죄송하지만 저는 한국인데요?"


움찔하는 반응이 나올 거라 생각했건만, 이각수 씨는 합리적이라 생각했던 본인의 주장이 나의 등장으로 인해 설득력을 잃은 것에 더 당황한 듯 보였다.


"아니, 어찌 됐건 중국 항공사라고 더 그러는 거 아니야! 그리고 저 사람들은 저기에 배정받았는데 왜 자리를 옮겨오겠다는 거야?"

"손님, 그렇죠. 이코노미석 모든 손님들이 배정받은 좌석은 한 자리가 맞죠. 그건 손님께서도 마찬가지 시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양해를 드리는 건 손님도 아시다시피 국적, 성별, 인종을 불문하고 노약자, 어린이, 임산부는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손님께서도 이 부분을 충분히 이해해주실 거란 생각에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각수 씨는 주춤했으나 여전히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지 몇 마디를 더 이어가며 항의했으나, 결국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저, 근데 죄송한데 선생님 혹시 한국분이신가요?"


잠잠해진 틈을 타 한국말로 불쑥 말을 걸어오는 나를 불만스럽게 응시하던 이각수 씨는 한 마디로 본인의 정체를 부인했다.


I don't understand.




일단 서비스가 너무 지연될 것을 우려하여 나를 포함한 이코노미 기조들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객실 서비스를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객실 매니저님과 어찌어찌 말을 잘 끝냈는지, 나중에는 중국인 부부가 이각수 씨의 자리에, 이각수 씨가 중국인 부부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찌 됐건 이각수 씨는 한 좌석뿐이었을지라도 빈자리를 얻어냈다.



하지만 좌석을 바꾸는 것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이각수 씨의 황당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어떻게든 비위생적인 순간을 포착해내기 위해 이코노미 클래스의 모든 화장실을 순회하는 것은 기본, 기내식이 어떻다느니, 승무원 표정이 어떻다느니 모든 순간 열과 성을 다해 흠을 찾았다. 덕분에 모든 기조들은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당직을 서며 그를 주시하던 기조 한 명이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면 바로 그가 일본어로 된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이름에 영어로 말하며 일본어 책을 읽는 이 사람,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비행시간이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승객 하기만을 앞두고 있었다. 역시나 이 순간에도 이각수 씨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사무장에게 이번 항편 자체에 컴플레인을 걸겠다며 오늘 탑승한 모든 기조의 이름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사무장은 물론, 해당 기조 본인의 동의 없이는 알려드릴 수는 없다고 답했다. 대신 컴플레인 방법에 대해서는 아주 친절하게 설명드렸다고.



비행기에서 내린 이코노미 기조들은 하나같이 나와 선배님에게로 와 "너희 한국인은 왜 그래?"를 연발했다. 나와 선배님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처럼 "그 사람 한국 사람 아니라니까"로 날아드는 원망을 일축했다.

물론, 아니라 답하던 마음속에는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많이 섞여있었지만.






비행을 하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정말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서로 다른 생각들을 이해하고 가끔은 부딪히고 조율하는 과정 속에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겸허한 마음'의 중요성이다. 무게를 알 수 없는 당신의 이야기에 개인적인 가치 판단만으로 옳고 그름의 딱지를 쉬이 붙이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선행 과제랄까. 나의 판단이 그릇될 수 있음을 항상 염두해두려 한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옳은 것이었음을 확신한다.

이각수 씨, 저는 국적, 성별, 인종을 떠나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것이 여전히 옳다 생각합니다.



* 본글은 L 선배님의 일화를 바탕으로 1인칭 시점에서 쓰여졌습니다.

* 흔한 이름은 최대한 피해보고자 했으나 혹여 상처가 됐을지도 모를, 전국에 계신 이각수 씨께 심심찮은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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