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걸음
노쇼(No Show)
"노쇼낼 뻔한 적이 있으신가요?"
응,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긴장을 너무 풀었는지 알람을 못 들은 거야,
전화받고 눈 뜨자마자 바로 '긴급탈출'했지.
유니폼만 입고 뛰쳐나와서 택시를 잡았어.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알람을 놓친 적이 없어.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긴장하고 다니게 되는 것 같아.
-선배 R
승무원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몰상식한 매니저? 막무가내 진상 승객? 피로 끝판왕 야간비행? 무한정 딜레이?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뒷골이 서늘하지만, 몰상식한 매니저와 진상 승객이 탑승한 채 딜레이 된 야간비행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내가 질색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노쇼(No Show)이다.
노쇼는 통상적으로 '예약을 했지만 취소 연락 없이 예약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손님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승무원이 사용하는 '노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안배된 비행시간에 맞춰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지 못하여 스케줄을 이행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융통성 없는 매니저와 진상 승객, 밤 비행과 딜레이. 이 모든 고난의 공통점은 '스케줄에 맞춰 공항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쇼는 다르다. 손 하나 까딱 하지 않아도 고난이 집 앞으로 배송된다. 대개는 나도 모를 새에. 말로 구슬리든, 정신 승리를 하든, 허벅지에 펜을 찌르든, 어찌어찌 내 선에서 해결이 가능한 앞선 상황들과는 달리 노쇼상황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날의 기억을 잠깐 꺼내볼까.
하루는 조카를 만나기 위해 언니가 있는 천안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듣자 하니, 빛을 본 지 4개월을 막 넘긴 조카님께서는 온 가족의 지대한 관심 속에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고 계신다고. 장기 스케줄로 상해에 들어가고 나면 한 달 동안 요 조막만 한 게 얼마나 눈에 밟히겠는가 싶어 엄마와 함께 천안으로 향했다.
듣던 대로 볼 살이 통통하게 오른 조카님은 갓 배운 필살기, 뒤집기를 당당히 시전 하며 본인의 성장세를 입증했다. 역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조카. 조카의 재롱을 보며 행복해하는 엄마와 그 옆에서 더더 행복해하는 언니를 보니 고되긴 해도 천안까지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콕 박혀 집안일과 육아에 몰두하고 있었을 언니를 위해 기분전환 차 동네 카페로 나섰다. 커다란 호수 옆에 위치한 2층 카페였다. 우리는 아메리카노와 앙증맞은 조각 케이크를 시켜놓고 그간의 근황을 나눴다. 한적한 카페, 창문 너머 울창한 나무들과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호수면, 쌉싸름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에 달달한 케이크 한 입. 사랑하는 이들의 웃음소리와 아기 향 폴폴 풍기는 사랑스러운 조카까지. 어떻게 모든 행복 조건이 이렇게나 완벽하게 들어맞을 수 있는지.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행복에 취해있기도 잠시,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현듯 비행 스케줄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에 심취한 내 앞의 두 사람을 향해 "오오, 정말?"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다음 스케줄이 이틀 후였던 것을 상기하며 스케줄 관리 어플을 클릭했다.
아니, 근데 이럴 수가. 오늘 날짜에 파란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스케줄 표의 파란 동그라미는 '비행하는 날'을 의미했다. 일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와,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심장이 이전과는 다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어플에 오류가 있나 보다. 아니, 어플에 문제가 있는 거여야만 한다. 황급히 어플을 종료하고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파란 동그라미는 여전히 오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괜찮아,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애써 삼키며 조심스레 파란 동그라미를 눌렀다.
상해로 가는 6시 40분 스케줄이었다. 지금 시간은 5시. 쇼업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사십 분. 사실 인천에 얌전히 붙어있기만 했어도 어떻게든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겠으나 문제는 지금 내가 여기, 천안에 와 있다는 거였다. 천안에서 올라가는 시간만 해도 두 시간은 들 텐데. 미친 듯이 달려 어찌어찌 공항에 도착한다 치더라도 유니폼은 어쩌지? 내 캐리어는? 구두는? 어피어런스는?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각이 나오지 않았다. 째깍째깍. 안중에도 없던 카페 구석, 벽걸이 시계의 초침 넘어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당직 선배님께 미리 연락을 드려야 하나? 뭐라고 해, 비행 못 갈 것 같다고?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 데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플랜을 택하든 이미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노쇼.
예상치도 못한 순간, 닥쳐온 낯선 상황에 서서히 깨져가던 멘탈이 중압감에 짓이겨 바스러졌다. 머릿속은 이미 '노쇼'라는 단어만 남고 하얘진 지 오래다. 누군가가 내 심장을 꽉 쥐고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무력감이 주는 고통에 참고 참던 눈물이 와락 터져 나왔다.
"나 어떡해 엄마, 비행기 놓쳤어, 어떡해, 비행이 있는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내려왔어. 나 이제 어떡하면 좋아, 엄마"
새하얗게 질린 채 갑작스레 눈물을 퐁퐁 쏟아내는 딸(그리고 동생)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심정은 어땠을까. 당시에는 그 마음을 헤아릴 여유조차 없었다. 불안함에, 내가 당장 죽을 것 같았으니까. 엄마가 내 옆으로 얼른 자리를 옮겨와 내 등을 토닥이며 나를 달랬다. 무어라 무어라 말을 해주시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어떡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모든 것이 나의 불찰 이건만 뭐가 그토록 서럽던지. 어떡해! 를 외치는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어라, 근데 나는 이렇게 큰 소리로 울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이상한 현실에 의문을 던짐과 동시에 감고 있던 두 눈이 번뜩 떠졌다. 하얀 천장이 보였다. 두어 번 눈을 끔뻑이다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으음, 음냐"
정확히 방금까지 내 귀가 위치하고 있었을 그곳을 향해 꾸준히도 잠꼬대를 쏟아내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아, 뭐야, 이거 다 꿈이었구나. 바람 꽉 찬 풍선처럼 긴장으로 팽팽해져 있던 몸이 안도감과 함께 바닥으로 축 쳐졌다. 어깨가 뻐근했다. 무더운 여름날에도 땀 한 방울 젖지 않던 등이 간밤에 흘린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슬쩍 이불을 걷어내고 조용히 거실로 나갔다. 조카의 모닝 칭얼거림에 못 이긴 언니는 이미 거실에 나와 있었다.
"잘 잤어?"
희미한 미소를 띤 나를 보며 언니가 물었다.
"응, 잘 잤어. 아니, 못 잤어도 돼. 그냥 지금 이게 현실이라는 게 너무 감사하다..."
단순한 질문에 알 수 없는 답을 늘어놓는 동생을 보며 언니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래도 잠이 덜 깼나 보다 싶었으리라.
언니는 아마 절대 모를 거다. 동생이 간밤에 어떤 지옥 체험을 하고 돌아왔는지, 지금 들려오는 조카의 옹알이 소리가, 정말이지 얼마나 감사한지.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노쇼를 내 본 적은 없다. 물론, 앞으로도 내 사전에 노쇼란 없다.
무력감에 "어떡해!"라는 말만 연신 부르짖던 그 날의 악몽만으로도 내 인생의 노쇼는 이미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