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권태기, 나를 일으켜준 건 1

소중한 당신들.

by 하늘을 걷는 여자

열 번째 걸음

극복


“인생의 권태기를 어떻게 극복했어?”


나는 운전을 배운다든지
인생에 새로운 관심사를 찾고
거기에 한동안 집중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극복이 된 것 같아.


-동기 Lee



* < 발목을 잡는 비행 권태기 > 편을 미리 읽어주세요!


야, 왔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생일 축하해!!



걱정한 순간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밝은 얼굴. 언니는 오랜만에 보니 더 반갑다며 부산스럽게 내 팔을 흔들었다.
간단하게 브런치를 먹은 후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니는 만류하는 나의 손을 기어이 뿌리치더니 작은 케이크를 사 왔다. 케이크 중앙에는 앙증맞은 초 하나가 꽂혔다. 카페 구석에 앉아 언니가 나지막이 불러주는 생일 노래를 들었다. 흔들리는 촛불을 잠자코 바라보는데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결국 꾹 참아냈지만.

차디찬 겨울, 한껏 부벼 작은 열기가 피어오른 손바닥을 꽁꽁 언 양 볼에 마주 댄 기분이었다. 잊고 있던 소소한 행복이 얼어붙은 마음의 녹는점이었던 것이리라.






달콤한 케이크를 입에 떠 넣으며 그간의 근황을 나누기 시작했다. 마음을 닫은 이후 지금껏 누구에게도 먼저 속 얘기를 꺼낸 적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그날만큼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오래도록 묻어놓은 마음이 두서없는 말들로 터져 나왔다. 언니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깊게 끄덕이며 마지막 한 마디까지 귀 기울여주었다.


"하자야, 사람마다 그 기간은 다르겠지만 언제가 됐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한 번쯤 고찰하게 되는 시간이 찾아와. 그건 당연한 거야."

익숙한 위로를 예상했건만, 신중하게 운을 떼는 언니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알고 보니 언니 또한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노력은 대부분의 경우 평가절하 되었으며 이상적인 공(公)적 관계에 대한 믿음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고 했다. '나는 세상을 마냥 아름답게만 바라봤구나' 하는 생각에 잠식됨과 동시에 이제껏 지켜온 신념들마저 파도가 덮친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고. 취업을 일찍 한 탓에 친구들에게도 감정을 속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고 했다. 힘겨운 하루가 배부른 푸념으로 비칠까 두려웠으리라.
당시 내로라하는 교육계 회사에서 팀장으로 승진을 앞두고 있던 언니는 현실에 혐증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너는 지금 행복하니?



오랜 고민 끝에 질문의 답이 'No'라고 결론을 도출해낸 그 길로 언니는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모두가 이런 기회를 놓치면 후회하지 않겠냐며 퇴사를 만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언니는 자신이 원하는 일, 자신이 잘하는 일에 대한 판단을 이미 끝낸 후였다.

퇴사를 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화려한 봄을 맞기 위한 월동준비였다고나 할까. 회사에 다니는 동안 부업처럼 해오던 '입시 설계'를 주업으로 돌아온 언니는 맨 땅에 헤딩이라는 마음으로 입시 플래너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단지 한 장을 붙일 때조차 고개를 주억거려야 했으나 특유의 꼼꼼함과 결단력으로 조금씩 학부모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이후,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전국적 관심을 받으며 자연스레 입시 플래너인 언니 또한 주목을 받았고 이전보다 더 많은 학생들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땐 그랬지,라고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얼굴에 수많은 표정이 섞여 있었다.

결이 비슷한 언니의 경험담이 내게 "괜찮아, 누구나 겪을 있는 성장통이야"하고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완벽한 직장은 없어. 장단이 있을 수밖에 없지. 그 점에 대해서는 인지를 하고 인정을 해야 해. 알다시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처한 환경과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그 모든 상황이 너를 너무 힘들게 한다면 물론 그곳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고려해봐야겠지만 일단 너를 힘들게 하는 게 뭔지, 극복이 불가능한지, 그렇다면 네가 하고 싶은 건 뭔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게 결정의 전제가 되어야 해."


맞는 말이었다. 마음에 꼭 맞는 완벽한 직장이 어디 있어. 사장님도 본인의 회사에 100% 만족을 못하는데 일개 직원은 오죽할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나를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직면한 문제들이 정말 극복이 불가능한 것일까.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언니는 또 한 번 사유의 중심으로 폭탄을 던졌다.


너는 뭘 할 때 즐거워?



생각 사이를 비집고 질문이 불쑥 고개를 디밀었다. 당황스러운 감정과는 별개로, 하얘진 머릿속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나, 나, 글 쓸 때!"


훅 치니 툭 튀어나오는 대답에 언니가 '뭐야, 이미 알고 있네.' 하며 웃었다.


"아니, 음, 그게 나는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어. 글 쓰는 게 너무 즐거웠거든. 물론, 부모님 반대가 너무 심해서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진 않았지만. 지금도 돌아다니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으면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아 글 쓰고 그래. 나중에,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내 이야기들을 한 번 글로 담아내 보고 싶기도 해."


부끄러움에 횡설수설 쏟아지는 대답을 잠자코 듣고 있던 언니가 자신의 핸드폰을 쓱 건넸다.


"내가 요즘에 애용하는 어플이 있거든, 브런치라고. 이게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있는 애플리케이션인데 이 어플에서 작가로 선정된 사람들이 글을 발행하고 그걸 나 같은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거야. 나는 이동시간에 가끔 들어가서 읽는데 발행 분야도 다양하고 책이 아니니까 완독에 대한 압박도 없고 꾸준히 글을 읽다 보니까 이래저래 도움되고 좋더라. 나야 글을 쓸 생각은 없지만 너는 글 쓰는 걸 좋아한다고 하니까 생각 있으면 이 애플리케이션에서 작가 신청을 한 번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자, 봐봐"


건네받은 핸드폰 속 처음 마주한 브런치는 멀끔한 인상의 신사 같았다. 깔끔한 흰 배경에 분야 별로, 직업 별로 보기 좋게 나열된 글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음속에 설렘이 슬며시 주입되었으나 짐짓 아무렇지 척 핸드폰을 도로 건네며 말했다.


"근데 나는 내 글이 읽을만한 수준인지 모르겠고 글을 쓴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뭐랄까, 글을 쓸 만큼 나란 사람이 푹 고아졌는지 모르겠어."


"모르겠는 것도 많다. 일단 글의 수준에 대해서는 본인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거잖아, 미리 고민하지 마. 작가 신청을 하고 나면 작품성에 대해서는 1차적으로는 브런치에서 판단해주겠지. 무슨 글을 쓸지는 사실 천천히 생각해봐도 되는 거고. 그리고 뭐 푹 고아졌고 아니고 그게 뭐가 중요해, 그 기준이 뭔데. 뭐 60살 땡! 하면 다 고아진 거야? 그렇지 않아. 넘어지고 깨지면서도 지금껏 열심히 살아온 네 인생에 자부심을 가져. 우리, 그래도 돼."


한 없이 작아진 동생을 향한 언니의 묵직한 진심이었다. "좋아! 일단 다운부터 받는다!" 장난스레 외치며 앉은자리에서 바로 브런치 앱을 다운로드했다.





언니와 안녕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달리는 차창 밖 빼곡하게 솟은 건물 사이로 빠알간 해가 드문드문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채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도시의 풍경을 하릴없이 바라보다 오늘은 너무 오랫동안 메시지 확인을 안 했구나 싶어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정말 뜻밖에도, 수많은 창들이 연달아 알림을 울리며 메시지 확인을 재촉하고 있었다.

머리카락 보일라 꽁꽁 숨기 바빴던 지난날들에 기억되는 것조차 사치라 생각했건만 온 화면을 빼곡히 채운 진심들이 '너 지금 혼자 뭐해, 얼른 이리 나와'하며 여기저기서 손을 뻗어왔다.

그날 결국 나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축하 메시지를 읽다가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오래 참았던 울음을.


그땐 너무 많은 생각들이 되려 나를 잡아먹은 게 아니었을까.





새삼스럽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려준 소중한 이들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래 앓아온 무기력을 이제는 이겨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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