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권태기, 나를 일으켜준 건 2

자존(自尊)

by 하늘을 걷는 여자


열한 번째 걸음

자존(自尊)



“자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내가 잘하고 있다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자기애?



-Miss han


* < 비행 권태기, 나를 일으켜준 건 1 >에서 이어집니다


집으로 돌아와 곰곰 생각에 잠겼다.

나를 이토록 작아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직면한 모든 것이 과연 해결 불가능한 문제일까? 나는 계속 승무원이고 싶은 게 맞을까?

답을 찾아내고자 끊임없이 내게 물었다. 이게 승무원으로서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감사하게도, 오랜 고민 끝에 질문의 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 찾아낸 해답의 본질은 자존(自尊)에 있었다.


자존 :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 나를 중히 여기는 것.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불공평한 평가? 발전 없는 업무? 기조들과의 관계? 좋다, 그렇다면 앞선 문제들을 당면했을 때 나는 도대체 왜 움츠리고 말았을까. 불공정한 평가에 진이 빠져서? 반복되는 업무에 흥미를 잃어서? 기조들의 무시가 두려워서?

단순하게 생각하면 충분히 일리 있는 대답이었으나 문제는, 이에 대적하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불공평한 평가 체계를 내가 무슨 수로 바꿀 수 있겠으며 기내 업무는 더 말해 뭐하랴. 기조들과의 관계마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선에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생각이 여기에서 그쳤다면 나는 아마 지금쯤 다른 직장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백기를 들어 올리는 대신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직면한 문제에서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등잔 밑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적이 보였다. 표면적인 문제 뒤에 조용히 숨어 있었던 적의 이름은 '외부에 찍은 중심점'이었다.

일을 시작한 뒤로 대부분의 시간이 비행에 할애되었다. 인생에 '일'이 차지하는 파이가 커지다 보니 비행은 어느 순간 자연스레 내 중심이 되어 있었다. 현재 주력하고 있는 일을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에 주어진 환경에 정신없이 몰입하다 보니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이 저항력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평가 체계가 불공정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타인의 평가에 비춰 나를 판단했다. 기조들과의 표면적인 관계에 일희일비했으며 눈치를 보느라 내 안에서 찾아내지 못한 의미를 발전 없는 업무 탓으로 돌렸다. 나 조차도 노력하는 나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던 외로운 시간이었다. 마음이 지쳐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칭찬은 자존감을 키워주는데, 가진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닌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눈치를 자라게 합니다. 중심점을 바깥에 놓고 눈치 보며 바깥을 살핍니다. 자존은 중심점을 안에 찍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겁니다.

-박웅현 <여덟 단어>


궁극적인 문제점을 발견하고 나니 해결책을 찾는 것은 오히려 간단했다. 외부에 찍었던 중심점을 내 안으로 끌어오면 되는 거였다. 바꿀 수 없는 문제들을 인정하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 불공정한 평가 체제는 바꿀 수 없다. 다만 나는 승무원으로서의 신념을 지켜가며 매 비행에 몰두하는 스스로를 충분히 자랑스러워 할 수 있다.

- 모든 기조가 항상 책임감 넘치며 호의적일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얕은 관계에 연연하기보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 반복되는 기내 업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오고 가는 수많은 인연 속에서, 매 비행 끝 새롭게 마주하는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고 발전해나갈 수 있다.


짚어보니 모든 해결책은 결국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이 모든 변화들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방식으로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게 바로 글쓰기였다.





당겨온 중심점을 내 안에 찍고 비행에 나섰다.

사실 어떤 마음 가짐으로 비행에 임하느냐는 종이 한 장의 차이였지만 그 '종이 한 장'이 가져온 결과는 가히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노력하는 내 모습은 나의 자부심이 되었고 소중한 내 사람들에게 자주 사랑을 표현하게 되었으며 매 비행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초대받지 않은 시련들이 불쑥 나를 찾아왔다. 나는 여전히 흔들렸고 가끔은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동굴 속으로 숨어들지 않았다.

내게 있어 일은 행복을 뒷받침하는 ‘수단’ 일뿐, 더 이상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다. 내 안에 찍은 점 하나가 행복을 가리키는 북두칠성이 되어 엎어진 나를 다시금 일어서게 만들었다.

하루하루, 변화의 흔적을 담은 기록들이 작은 수첩에 쌓여갔다. 글 쓰기는 완벽한 ‘목적’이 되어 주었다. 소소한 기록들이 때론 초심의 주춧돌이, 또 때론 함께 걷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한 달 후, 나는 권태기에 눈이 가리어져 잊고 있었던 '내가 사랑하는 순간들'을 완전히 되찾게 되었다.






우울의 늪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즈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바로 객실 승무직에 대해 알리는 것이었다. 당시 생각했던 주요 타깃은 승준생들이었다.

먼저 아파봤으니까, 충분히 깨져봤으니까 부디 이제 피어날 꽃들은 더 이상 무지(无知)에 뿌리를 내리고 시작하지 않았으면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데, 함께 참전은 못할지언정 이런 적이 나타나니 부디 조심하라 말해주고 싶었다. 순수한 꿈들이 냉혹한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마는지 내가 아니까.

그 길로 평소 기웃거리기만 하던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했다. 감사하게도 브런치는 기꺼이 나의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묵직한 응원의 한 마디와 함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나의 긴긴 < 무기력 극복기 >는 이렇게 끝이 난다.

지금은 감사한 마음으로 비행에 임하고 있는 나 조차도 웃긴 모양새로 납작 엎어져 있던 순간이 있었다. 무력감이 모든 감정을 잠식했던 인생의 흑역사가.

부디 수줍게 들춰낸 이 이야기가 어디선가 흔들리고 있을 그네들에게는 심심찮은 위로가, 막연한 기대로 부풀어 있을 어린양들에게는 경종이 되어 닿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내가 해냈으니 분명 당신도 해낼 수 있을 거다. 당신을 한 번 믿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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