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w 여덟 번째 주제 - 현재
아침 여덟 시. 은근한 아침 햇살의 끈질긴 눈꺼풀 공격이 절정에 달한다. 깰락 말락 한 상태 그대로 눈을 더욱 질끈 감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린다.
이십 분 정도 지났을까. 달그락달그락, 꽁지발을 든 채 방으로 들어온 아빠가 침대 맡에 놓인 강아지 사료통을 연다. 토도토도, 아빠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조그만 발걸음 소리. 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신이 나서 씰룩 쌜룩 엉덩이를 흔들고 있을 테지, 안 봐도 비디오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이제부터는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투두두두두두둑. 한 컵. 그리고 투두두두, 그럼 그렇지. 몸을 잽싸게 일으키며 떠지지 않는 눈을 치켜뜬다.
"아빠! 옹이 밥 많이 주지 말라고 내가 했어, 안 했어!"
"아냐 밥 많이 안 줬어. 딱 한 컵이야, 한 컵!"
"무슨 소리야, 내가 다 듣고 있었어, 딱 기다려봐. 어디 다시 컵에 담아 보자구."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아빠의 바짇 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진다. 오늘도 어김없이 옥신각신 하는 모녀 사이에서 그릇의 주인은 얌전히 앉아 댕그란 눈을 껌뻑인다. 익숙한 풍경이다. '여보, 못난이 딸내미가 사람 잡는다!!!' 하며 밥그릇을 뺏긴 아빠가 방을 먼저 나서고 나면 사료 반 그릇을 덜어낸 내가 뒤이어 비척비척 거실로 나와 옹이의 밥을 챙긴다.
아침의 시작이다.
*
여덟 시 반.
"오늘은 냉잇국이야. 봄이니까 냉이를 한 번 먹어야지!"
화려한 아침상 위로 쏟아지는 엄마의 더 화려한 미소가 아침을 알린다.
"오, 대박. 냉이 향기 대박. 이런 건 또 부지런히 어디서 캐왔대? 울 엄마도 대단해, 정말."
엄마의 간단한 메뉴 소개에 맞장구를 치며 칫솔을 입에 물어 든다. 상쾌한 민트향으로 남은 졸음을 몰아낸다.
양치를 마치고 구수한 향을 풍기는 냉잇국 앞으로 바짝 의자를 당겨 앉는다. 식탁 위로는 이미 밥숟갈이 분주하다. 내 앞에 놓인 포슬포슬한 밥 위로 은근히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헤실헤실 웃는다.
"여보, 애가 잠이 덜 깼나 봐. 옹아, 네 언니 왜 이래?"
아빠의 취미는 딸한테 시비 걸기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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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시.
"애애애-앵"
건넌방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우리 집 신흥 무법자의 기상시간이다.
이내 10개월짜리 조카를 품에 안은 언니가 남은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걸어 나온다. 조막만 한 손으로 온 얼굴을 비비적대는 요 꼬맹이에게서 기분 좋은 애기 향이 폴폴 풍긴다. 아, 힐링된다.
티브이에서는 SBS 아침 드라마 <맛 좀 보실래요>가 한창이다. 아침 드라마라면 모름지기 엄마 어깨너머로 간간이 보는 게 제맛이라 생각했건만 집콕의 시작과 함께 열혈 애청자가 되어버렸다. 근데 이게 글쎄, 꽤나 재밌다. 과장 조오금 보태서 이거 보려고 매일 아침에 눈 뜬다.
진상아, 다음 화에서는 사람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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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시 반.
식사를 마친 엄마 아빠가 출근을 하고 나면 다음은 엄마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한 일상 루틴의 시작된다.
일단 설거지를 시작한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뒤늦게 일어난 동생의 콘프로스트 그릇과 조카님의 이유식 그릇과 언니의 아침밥 그릇이 한 발 늦게 설거지 통에 담긴다.
다음은 청소기 밀기.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굴러다니는 물건을 정리한다. 요새 기어 달리기로 챔피언 급을 찍는 조카님은 온 방에 행차하며 온갖 물건을 헤집어두신다. 널브러진 호기심의 잔해를 정리하곤 온 방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린다. 마지막에는 꼭 먼지 필터를 꺼내서 털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청소기를 돌리고도 잔소리 듣기 십상이다.
밀대 기계를 든 동생이 내 뒤를 따라 걸레질을 한다. 위잉, 위잉, 옹이는 소음을 피해 이리저리 자리 옮기기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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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시 반. 쓸고 닦은 거실 바닥 위로 건조된 빨랫감들이 쏟아진다. 엄마가 출근 전 돌려놓은 건조기에서 빨랫감을 꺼내온 언니는 차곡차곡 잘 마른빨래들을 구분하여 접는다. 청소를 마친 나와 동생이 언니 옆에 쪼르르 따라 앉는다. 일찍이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던 조카님은 각 맞춰 접어놓은 수건을 손에 쥐고 흔들기 바쁘다.
"으이그, 노는 놈 따로 있고, 일하는 놈 따로 있지, 요놈아."
언니가 딱밤 때리는 시늉을 한다. 무법자는 눈 깜짝하지 않고 더 세차게 접어놓은 수건을 흩트린다. 동생이 서둘러 <바나나 차차> 영상을 재생한다.
경쾌한 선율에 시선을 빼앗긴 조카를 멀찍이 앉혀놓고는 나머지 옷가지를 서둘러 접는다.
휴. 사랑해요, 뽀로로 티비, 당신 없인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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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시 이십 분. 언니가 점심 식사를 위해 요리를 시작한다.
이제부터가 가장 고된 노동(?)의 시작이다. 내로라하는 엄마 껌딱지가 엄마를 찾으며 울음을 터트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한 이모들의 투혼이 시작된다. 네버 앤딩 까꿍놀이와 비행기 태우기, 책 읽어주기, 동요 부르기, 막춤 추기 등 갖은 방법이 동원된다. 치사한 동생 녀석은 오늘도 중간에 슬쩍 빠져나가서는 옹이와 함께 침대에 퍼질러 누워있다. 이렇게 매일 같이 조카님 혼을 빼놓겠다고 춤을 추다가는 언젠가 내 혼이 먼저 빠지지 않을까 심히 염려된다.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쉴 새 없이 막춤을 추며 마지막 자존심을 부린다.
"야, 이모가 누누이 말하지만 이모 아무데서나 이렇게 막춤 추는 쉬운 사람 아니야, 알았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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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시 이십 분. 엄마 아빠가 점심 식사를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에 옹이가 벼락같이 현관문으로 뛰어 나선다. 얼른 손을 닦고 나온 아빠는 두 발로 겅중대는 옹이를 안아 올리고 엄마는 엉금엉금 기어 오는 조카님을 향해 두 팔을 벌린다. '엄마, 아빠. 여기 우리도 있어-' 하며 툴툴 대는 나를 향한 아빠의 장난 가득한 한 마디.
"옹이 봐봐, 아빠만 오면 신발장까지 맨 발로 뛰어나오지. 지안이도 네 발로 열심히 기어 오지. 겨우 얼굴만 빼꼼 내미는 딸들보다 낫다, 안 그래?"
... 아무래도 언젠가 한 번 기어서 맨 발로 신발장까지 뛰어나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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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반. 식사를 마친 가족들이 취향껏 티타임을 가진다.
아빠는 도라지 생강차, 엄마랑 나는 뜨끈한 아메리카노, 언니는 달고나 라떼, 동생은 요구르트. 조카님의 꿈나라 여행 덕에 찾아온 간만의 '조용한' 휴식 시간이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의 얼굴을 훑는다. 생각해보니 벌써 두 달째 백수 생활 중이다. 입사 이래 역대 최장기간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완전히 감상에 젖을 때 즈음 아빠와 눈이 마주친다.
"왜? 아빠 얼굴에 잘생김이라도 묻었어?"
우리 아빠는 도무지 나에게 감성에 젖을 시간을 주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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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두 시. 이때부터는 특정한 루틴이 없다.
어떤 날은 책 정리를 하고 어떤 날은 손빨래를 한다. 또 어떤 날은 집 앞 산책을 하기도 하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도 한다.
오늘은 미루고 미뤄왔던 옷 정리를 하기로 한다. 봄 옷을 꺼낼 때가 됐다. 겨우내 옷장을 가득 차지하던 두꺼운 옷들을 꺼내고 봄여름 옷을 채워 넣는다. 간간히 옷을 헤쳐대는 조카님의 손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기계처럼 옷을 접다 보니 뭔가 심심하다. 게임을 제안했다.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에게 마음대로 옷을 입히기로 한다.
승패에 굴복하지 못한 자들의 지지멸렬한 승부 끝에 기다리는 것은 '자승자박'이다. 끝까지 투닥거리던 셋 모두가 사이좋게 벌칙을 수행하기로 한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가장 추레하고 촌스런 옷을 상대방의 품에 안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옷을 입어보지만 아니나 다를까, 소화가 불가능이다. 서로의 꼴을 바라보며 배꼽을 잡고 웃는다. 웃음이 오래도록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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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여섯 시 반. 일을 마친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오신다.
각 방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튀어나와 분주하게 저녁상을 준비한다. 오늘의 메뉴는 대패 삼겹살이다. 훌륭한 안주에 아빠는 소주 병을 까고 우리는 오백 미리 맥주를 세 잔에 나누어 담는다. 엄마는 술은 됐다며 손사래 치며 조카님 저녁 이유식 먹이기에 바쁘다.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오늘의 뉴스를 화제로 이야기가 오간다. 때때로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지만 마무리는 대게 유머와 웃음이다. 다행히 오늘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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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여덟 시. 창 밖은 이미 어둠이 짙다. 살짝 소화가 된다 싶을 때즈음 거실 바닥에 요가 매트를 세 개를 나란히 놓는다.
운동의 시작은 땅끄 부부의 유산소 운동이다. 다음은 캐시 안뒤벅지 운동과 삐약스핏의 팔 운동이다. 다른 건 괜찮은데 캐시 뒷 벅지는 진짜 지옥의 운동이다.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 와중에 팔자 좋은 개님은 옆에서 자꾸만 인형을 던져달라 보채오고 일 치는데 빠지면 섭한 조카님은 빛의 속도로 기어와선 순식간에 노트북을 두드려 놓는다. 이쯤 되면 운동인지 전쟁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꿋꿋이 강하나 하체 스트레칭으로 뭉친 근육을 풀어준 후 폼롤러로 운동을 마무리한다. 기특하다, 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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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열 시. 목욕을 끝낸 후 덜 마른 축축한 머리를 탈탈 털며 침대에 몸을 뉘인다.
이제부터는 온전한 휴식 시간이다! 대개는 친구들에게 밀린 답장을 보내거나 크레마를 읽는다. 물론 이마저도 조카님이 이모와 그다지 장난을 치고 싶지 않은, 잠잠한 밤에만 가능한 일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거실에서는 콩순이 노래를 불러가며 열정적으로 조카님과 놀아주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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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시 반. 슬슬 가족들과 굿나잇 인사를 나눈다.
아홉 시 땡 신데렐라 아빠는 이미 주무시러 들어간 지 오래다. 저녁 드라마를 시청하는 엄마 옆에 가만히 앉은 옹이의 눈꺼풀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는다. 언니의 품에 안긴 조카님도 우유병을 문 채 잘 채비를 하고 유일하게 동생만이 이름 모를 집짓기 게임에 한창이다.
다들 잘자요!
굿나잇 인사와 함께 방문을 닫는다. 전기장판을 약하게 틀어 놓고는 뜨끈한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간다. 이내 몸을 꾸물꾸물 뒤척이며 가장 편한 자세를 찾는다. 잘 준비 끝이다.
예상컨대, 아마 내일도 오늘과 비슷한 하루가 펼쳐지리라.
예고편을 본 것만 같은 내일에 마음이 이렇게 은근히 부풀어 오르는 건 아마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매 순간에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간은 어느덧 열 두시를 가리킨다. 이제 정말 잘 시간이다. 오늘도, 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