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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을 걷는 여자 Apr 15. 2020

할머니의 마지막 수업

Glow 아홉 번째 주제 - 미래

 미래는 항상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예쁜 책가방을 매고 등교 차량에 올라타는 언니의 뒷모습이 그랬고 부모님의 허락 없이도 밤 12시까지 pc방에서 게임을 할 수 있는 친척 언니가 그랬고 무슨 일이든 거뜬하게 해내는 아빠의 든든한 어깨가 그랬다.

 미래는 늘 현재의 내가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나는 늘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른다고 생각했다. 언니들의 하교를 홀로 기다리며 "나도 얼른 언니(어른을 의미함)가 되고 싶다"는 말을 밥 먹듯 되내었다.


 미래를 동경하던 어린이의 시간은 부지런이 흘러갔다.

어느덧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예쁜 책가방을 갖게 되었고 성인이 되어 pc방 10시 땡 신데렐라 신세를 면하게 되었으며 뭐, 아빠처럼 무슨 일이든 거뜬하게 해내지는 못 하지만 적당히 밥벌이는 해내는 직장인이 되었다.

 소싯적 꿈에 그리던 '언니'의 나이가 되어 생각해보건대 그 시절 꼬꼬마는 아마 흘러가는 시간 끝에는 황금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무작정 믿었던 듯싶다. 얼마나 순진무구한 발상인지.

 


 조금 더 자라 세월이 모든 것을 가능케하는 전능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로는 코뿔소처럼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다. '황금빛 미래'를 일궈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낭비된 날들까지 합쳐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았달까.

 그러자 시간이 전과 다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양 손을 뻗어 아무리 막아봐도 시간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세월의 수챗구멍 속으로 빠르게 흘러 사라져 갔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간을 초단위로 쪼개었고 그 시간은 항상 미래에 투자하는 쪽으로 배팅되었다. 당장의 행복은 미래를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다.

 

 

  스스로와 경쟁하듯 쉼 없이 달려 '그 나이 때가 되면 그렇게 되어있겠지'의 '그렇게'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행복에 대한 갈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분명 바라던 소정의 목표를 이루었는데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흘러갔으며 오히려 예상치 못한 인생의 변수들이 불쑥 고개를 디밀고는 기다렸단 듯 일상을 흔들어놓기 일쑤였다.



 그렇게 불행의 원인조차 모른 채 바삐 보내던 아주 보통의 어느 날.

너무나 갑작스럽게도, 외할머니의 부고 전화를 받게 되었다. 이는 가족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나 또한 믿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나의 행복한 미래에 함께 해야 할 사람이었다. 성공해서 언젠가 꼭 호강시켜드리겠다던 손녀의 약속은 멀어진 할머니의 시간 앞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몇 개월 전 손수 찍어드렸던 사진이 영정에 걸렸다. 사진 속 할머니는 수줍은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일로, 또 내일로 미뤄왔던 할머니와의 시간이 가슴에 사무쳤다.

 할머니는 내일을 향해 달리는 폭주 기관차가 미래와 맞바꾼 현재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놓치고 있었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생을 살아가며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라


 


   그 이후로 나는 언제나 '현재'에 주목했다.

가족들에게 더 자주 사랑한다 말하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였으며 내가 당장 하고 싶은 일을 저- 멀리 미뤄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숨 가쁘게 흘러가던 시간은 충실하게 채워내는 하루 속에서 천천히 본래의 속도를 찾아갔다.

내가 온전히 관여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것을 절절히 배웠기에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오늘 하루도 후회하지 말자' 다짐했다.  



나는 더 이상 미래를 동경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의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도 이루고픈 꿈이 있고 그려둔 인생의 지도가 있다.
다만, 예측 불가능한 내일을 좇느라 당장 눈 앞의 소중한 무언가를 놓치는 가슴 아픈 우(愚)는 인생에 한 번이면 족할 뿐이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손녀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은 분명 행복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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