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w 10번째 주제 - 사회적 거리두기
띵! 오늘의 일정을 알려주는 알람이 울린다.
요새는 집, 집, 집 그리고 집이 일정이라 알람이 울릴만한 일이 없을 텐데 이게 웬일인가 싶어 아리송해하며 핸드폰 화면을 켰다.
알림을 확인해보니 오늘의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오늘은 중학교 단짝 깡쓰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미국에 있는 친구 집에서 잠깐 지내다가 돌아올 거라던 깡쓰와의 지난 연락을 상기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야, 깡쓰 생일 축하해! 미국에서는 돌아왔냐?
-응, 한국 왔어! 지지난주에 와서 계속 격리 중이었어.
-아 진짜? 지지난주에 돌아온 거면 오늘이 몇일째야?
-음, 오늘이 딱 2주 째이기는 한데 미국에 있던 내 친구가 집에만 있었는데도 의심 증상이 약간 있었어서. 단순 감기였을 수도 있지만 한 일주일 정도만 더 자가 격리하려고.
-그렇구나, 방에서 답답하겠다. 그럼 오늘 생일은 방에서만 보내는 거야?
-그렇지, 나 3층에서 혼자 살아. 화장실도 같이 쓰면 안 되니까.
10년 전, 딱 한 번 가봤던 친구네 3층 다락방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거기 올라가 있구나, 진짜 철저하게 잘하고 있네. 밖으로는 아예 안 나오는 거야?
-웅, 엄마 아빠도 밥시간 때만 딱 3층 계단 밑 테이블에 밥 올려놓으러만 오시고 내가 나가면 도망가셔... 대문 밖으로는 한 발 짝도 안나 가봤어.
-철저하게 해야 하는 게 맞긴한데 뭔가 웃프다....ㅋㅋㅋㅋㅋ
-야, 철저함을 가장한 능욕이야, 이건. 나만 나오면 '으악! 바이러스다!!!' 하면서 도망간다고.
-뭐라고?ㅋㅋㅋㅋㅋ 음, 그건 능욕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깡쓰와 기분 좋게 짧은 수다를 마쳤다. 나름 긍정적으로 격리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다행이다 싶다가도 생일을 맞았음에도 방에 꼼짝없이 갇혀 있을 친구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로서니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건 안될 일이었다. 격리 기간이 지났다고는 하나 집에 와 있는 10개월짜리 꼬꼬마 녀석 때문에 일거일동이 더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다음 주에 연락해야겠다.'
생각하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리다가 무심코 시선이 닿은 내 방구석 선반 위 친구에게 주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선물이 보였다. 괜스레 마음이 짠했다. 슬쩍 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후 3시 49분을 지나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오지랖퍼는 잠깐의 고민 끝에 결국 깡쓰를 위해 '사회적 거리 두고 이벤트'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색깔 A4 용지에 깡쓰를 위한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적었다. 그다음, 메시지가 적힌 종이를 한 장 한 장 예쁘게 꾸며냈다. 마무리로 가느다란 실을 축하 종이에 일렬로 엮어 가랜드 형태로 만들었다. 이 정도면 3층에서 격리 중일 친구에게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비한 선물과 가랜드를 들고 집을 나섰다. 친구네 집으로 출발하기 전, 동네 빵집에 들려 작은 케이크도 하나 샀다. 친구의 반응이 너무나도 궁금해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고 싶었다. 보조석에 모든 준비물을 싣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무렴, 어떻게든 찾아내겠지!'
막가파 근자감에 가득 차서는 10년도 더 된 흐릿한 기억에 기대어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길을 잃어 슬금슬금 후진해나오기를 두 어번, 드디어 기억 속 친구네 집에 도착했다. 혹여 준비 중에 들키지 않도록 차를 집과 멀찍이 세워두고는 살금살금 집 앞으로 향했다. 가져온 선물과 케이크를 잠깐 집 앞 계단에 올려두고 준비한 가랜드를 펼쳐 들었다. 좋아, 이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창문 밖을 좀 보라고 이야기하면 미션 클리어다. 달뜬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르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오며- "
어쩐지 일이 너무 수월하게 진행되더라니. 나의 연달은 전화 세례에도 수화기 너머의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잠잠하던 바람이 매섭게 불어대기 시작했다. 문 밖에서 잠깐 이벤트만 해주고 돌아갈 생각에 변변한 옷가지 하나 챙기지 않았던 내가 추위로 몸을 베베 꼬기 시작했음은 물론이요, 준비했던 가랜드는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얽히고설켜 한 뭉텅이가 되어버렸다.
꼬인 가랜드를 풀어가며 추위에 떤 지 10분쯤 지났을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창피함을 무릅쓰고 숨을 흡, 들이마셨다가 냅다 친구의 이름을 외쳤다.
"깡쓰! (깡쓰~ 깡쓰~ 깡쓰~)"
조용한 단독 주택촌에 애처로운 목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하지만 굳게 닫힌 창문은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 한 번 더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은 주민들에게 민폐가 될 것 같아 일단 물건을 챙겨 들고 차 안으로 돌아왔다. 추운 와중에 얼굴은 화끈거렸다. 시간은 벌써 7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미 주변은 조금씩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좀 더 기다려야 할지 고민이 됐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깡쓰네 현관등이 노랗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 곧장 차에서 내려 강쓰네 집 앞으로 내달렸다. 현관 등이 들어와 있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먼발치서 꽁지발을 들고 서성이고 있다 보니 뒷 정원에서 아저씨가 걸어 나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저, 저, 저 깡쓰 아저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두리번 대시던 아저씨는 이윽고 SOS 신호 보내듯 양 팔을 휘젓고 있는 나를 발견하시고는 '엥?'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너는 누구니?"
"저 깡쓰 중학교 친구 하자인데요, 오늘 깡쓰 생일이잖아요! 먼발치에서 축하해주고 가려고 했는데 애가 자는지 전화를 통 안 받아서 그런데 혹시 깡쓰 좀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아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잠시만 기다려."
오케이, 됐다!
얼굴을 보고 생일을 축하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도 잠시, 눈치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이미 한 몸이 되어버린 메시지 가랜드와 급하게 씨름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랜드를 미처 복구시키기도 전, 눈이 동그래진 친구가 3층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야, 미쳤어. 이게 뭐야!!!!!!!!"
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을 들고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나를 향해 친구가 소리쳤다.
"깡쓰, 생일 축하해!!!!! 원래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 좀 망했어!!!!!!”
"벽 페인트 칠 한다고 핸드폰 멀리 둬서 그랬지! 뭐가 망해, 나 진짜 감동이야. 이게 다 뭐야."
"생일이잖아, 생일 축하한다고! 물건은 다 여기 둘게. 나중에 부탁드려서 들고 들어가."
"알았어, 야 나 오늘 저녁 안 먹을 거야. 감동을 너무 먹었어. 누가 집 앞까지 찾아와서 이벤트 해준 거 난생처음이야. 나만 이 꼴이 아니었어도 같이 밥 먹고 가면 좋은데."
"그럼 성공이고. 밥이야 다음에 먹으면 되지, 나 이제 그만 간다! 생일 축하해!!!"
그만 간다는 나의 말에 현관문 뒤에서 우리를 몰래 지켜보고 있던 깡쓰의 부모님께서 '다음에는 놀고 가'라며 흐뭇한 미소로 가는 길을 마중해주셨다. 뿌듯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거창하게 '이벤트'라 말하기엔 엉킨 가랜드를 들고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된 냥 창문 너머로 몇 마디 주고받은 게 고작이지만 친구의 환한 미소를 보았으니 오늘의 '사회적 거리 두고 이벤트'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겠지. 좌우지간 이걸로 오늘의 행복 할당량은 충분히 채웠다.
* 유난히 시린 봄이다. 사랑할수록 멀어져야 하는 이 잔인한 계절 속에서 우리는 일상의 소중함을, 연대의 중요성을, 성숙한 시민의 책임의식을 배워가고 있다. 두터운 마스크 뒤로 못다 한 말을, 당장은 꾹꾹 눌러 삼킬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칠흑 같은 밤을 지새운 뒤 맞이한 새벽의 태양이 더욱 눈부시듯, 언젠가 되찾을 계절 속에서는 더 예쁘게 피어난 봄을 만날 수 있으리란 걸.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소설 <페스트>를 빌려 말한다. 페스트로 죽어가는 도시에 다시금 숨을 불어넣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연대로 뭉친 성실한 개인이라고.
성실성이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 <페스트> 中
보통의 하루를 되찾기 위해 각자 위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전국의 이름 모를 위대한 개인들을 향해 오늘도 진심 어린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