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만으로 부족하냐고요?
이상은 소설 ‘권태’에서 이런 말을 전한다.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글’은 첫사랑처럼 내 삶에 스미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코흘리개 시절, 하루 끝에 일기를 쓱쓱 써 내려가던 언니의 뒷모습이 근사해 보였을 때부터일까, 아니면 어린 날 좋아하는 친구에게 건넨 밤새 쓴 편지가 손 끝에서 간질간질했을 때부터였을까. 뭐, 언제부터였는지는 사실 중요치 않다. 내 마음을 툭툭 글 속에 던져 놓는 게 좋았다. 꾹꾹 눌러쓴 글자가 빼곡히 담긴 노트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던 어린 날, 그 찰나의 순간은 지금도 여전히 추억 속에 남아 잔잔한 향기를 풍겨낸다.
하지만 훗날 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빚어지는 두려움에 전복되고 말았고 끝끝내 정열의 생물이 되지 못했다.
그 후 간간히 글을 썼다. 보통 당시에 떠오르는 감정이나 감상을 무작위로 적었으나, 단 한 글자도 허투루 놓아주지 않았다. 불을 보고도 뛰어들지 못한 용기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였다.
또 시간은 흘렀다. 늘 올려다보던 하늘이 내 직장이 되었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매 선택의 순간,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 수많은 ‘최선들’의 결과가 어떠하였건 나는 우직스레 걸어온 내 삶이 퍽 자랑스러웠다. 다만, 이 모든 것이 결국 ‘뒷걸음질’로부터 시작된 기이한 나비효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지구를 19바퀴쯤 돌 무렵, 어쩌면 ‘포기’에서부터 시작된 내 삶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미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러하지 못했으나 이제 막 움트고 있는 그네들은 삶은 뛰어듦에서부터 시작했으면 했고 그에 앞서 꿈의 맨 얼굴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생각들을 따라 쭉 걸어오다 보니 우연찮게 나는 내가 뒷걸음질 쳤던 그 자리에 서있었다. 글 앞에.
여전히 망설이고 있던 내게 한 마디가 뜨겁게 와 닿았다.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의 소망, 우리의 욕망은 해봤을 때 뜨겁게 알 수 있어요. 내 것인지, 아닌 지-. 해 보지도 않고 접어두면 평생 헷갈려요.”
멀리 돌아오긴 했으나 사실은 끝내 한 번은 마주해야 했을 순간에 당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용기 있는 불나방이 되어보자 결심했다.
그렇게 나는 브런치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