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푼 비빔밥의 추억
2019년 7월 28일 일요일.
오랜만에 스케줄이 없는 동기들과 한 방에 모여 앉았다. 우리의 아침 메뉴는 한국에서 가져온 짜장 라볶이.
누군가는 조식장에서 들고 온 삶은 달걀을 까고 누군가는 끓는 물에 떡을 풀고 누군가는 식기와 음료를 준비한다.
마지막 달걀 껍데기를 말끔히 까낸 후 고개를 들었다. 다음은 뭘 해야 하지, 생각하며 동기들을 살핀다. 각자의 듀티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건 뭐 영락없는 비행기 안이다.
‘천상 승무원들이구만.’
생각하며 컵과 접시를 마저 챙긴다.
짜장볶이가 끓기 시작한다. 조식장에서 시킨 계란밥도 도착이다. 뽀얀 삶은 달걀을 라면 위에 통통 떨군다. 고국의 제품과 함께하는 만족스러운 아침밥이다.
배가 어느 정도 차오를 때쯤 A동기가 말한다.
- 생각해보니까 오늘 일요일이네. 우리 집은 일요일마다 안성탕면 끓여먹었는데.
동기 L이 짜장 면발을 젓가락에 휘휘 감으며 말한다.
- 우리는 김치볶음밥 아니면 김치김밥! 엄마의 요리 해방 데이였지.
- 엥? 김밥은 손이 많이 가지 않나?
- 아냐, 그냥 김밥 김에 밥 놓고 그 위에 김치만 넣어서 돌돌 말아먹는 거야. 다른 재료 없이.
-와... 생각만 해도 좋다. 밥 다 먹어 놓고 또 군침 돌아. 김치 먹고 싶다.
와, 우리 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들 비슷한 기억이 있다니. 잠잠 듣고 있던 나도 한 마디 거든다.
“우리 집은 일요일엔 양푼 비빔밥!”
일고여덟살께였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동네의 내노라하는 편식쟁이였다. 유난히 나물 반찬을 좋아하시던 부모님의 건강한 한상이 편식쟁이 어린이에게 반가울 리 없었다. 고로 집에서 밥을 먹을 때면 나는 늘 ‘한입만’으로 변하곤 했다. 밥을 딱 한 입만 먹고 기어코 떼를 써 밥상을 물리고야 마는 무시무시한 편식 괴물 말이다. 하지만 그 악명 높은 한입만도 집밥을 기다릴 때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일요일이었다.
일요일만 되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어찌 그렇게 눈이 잘 떠지는지. 눈도 못 뜬 채 거실로 밀려 나오는 나와 언니들을 보며 엄마는 “평소에 깨울 때나 이렇게 잘 일어날 것이지.”하며 미소를 띤 채 눈을 흘긴다. 이읔고 새벽 업무를 마치고 아빠가 돌아오시면 아침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선 작은 세숫대야 크기의 양푼을 가운데 놓고 함께 빙 둘러앉는다. 뜨듯한 밥을 텅텅 양푼 안으로 떨구고 한 주간 해치우지 못한 나물 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마찬가지로 털어낸다. 가끔, 아차! 할 틈도 없이 오징어 볶음과 같은 무리수 반찬을 양푼에 쏟아버리는 아빠에게 세 딸의 잔소리 따발총이 쏟아지기도 한다.
“아유, 애들 싫어하는 거 알면서”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엄마가 자글자글 거리는 프라이팬을 들고 오신다. 계란 프라이다. 적당히 노릇하게 구워진 커다란 계란 프라이가 밥과 나물을 넉넉히 덮는다. 그 위로 고소한 참기름 듬뿍, 고추장 세 큰 술. 프라이팬을 주방에 두고 돌아온 엄마까지 양푼 주변에 앉고 나면 모두가 일제히 숟가락을 든다.
“공격 개시!!!!”
아빠의 장난스러운 외침과 함께 세 자매의 숟가락이 꺄르륵 웃음소리와 함께 양푼에 담긴다. 세 딸의 숟가락이 빠지고 나면 아빠의 큼지막한 숟가락이 양푼 속 얼룩덜룩 비벼진 남은 재료를 잘 섞어낸다. 고루 섞인 비빔밥이 각자의 밥그릇에 봉긋이 담기고 나면 아빠는 고추장 두 숟갈을 더, 엄마는 애호박 볶음을 더, 큰언니는 참기름을 더. 작은언니와 나는 이미 코를 박고 먹고 있다. 따로따로 먹을 때면 그렇게 안 넘어가던 나물들이 한 데 비벼놓으니 어쩜 이리도 맛있는지.
뭐, 사실 맛도 맛이었지만 주말 아침의 양푼 비빔밥이 내게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만큼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평일 아침과 달리 모두가 발걸음을 늦출 수 있었다. 아빠가 일에 쫓겨 부랴부랴 집을 나서지 않았고 엄마가 “상 잘 치우고 가”라며 일찌감치 밥상을 뜨는 일도 없었으며 언니들은 등교 걱정 없이 내 곁에 앉아 나를 느긋하게 기다려줬다. 우리는 양푼을 두고 둘러앉아 서로 눈을 맞추고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으며 애정 섞인 장난을 주고받았다. 우리 가족의 주말 아침을 책임지던 양푼 비빔밥은 ‘함께’라는 재료 덕에 더 특별한 맛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와, 양푼 비빔밥 대박이다. 고추장 넣고 딱! 크으, 나중에 한국에서 양푼도 하나 사 올까?
-오, 좋아. 냄비 포트도 샀는데 양푼이라고 어려울까. 이번에도 공구하자.
-좋지, 다음 만찬도 기대되네.
-이번에도 먹으면서 또 먹을 얘기야, 우린.
-뭐야, 아마추어같이 왜 이래? 초심을 잃은거야?
하하하하, 비어 가는 접시 위에 일제히 터져 나온 웃음이 담긴다. 이제는 가족의 품을 떠나 타국에서 맞는 아침, 오늘 나의 일요일 아침을 책임져준 짜장 라볶이를 먹으며 묻는다. 당신의 일요일 아침을 책임지던 추억의 음식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