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사립이 아닌 공립이었는데, 1주일에 한 시간 CA 특별활동 동아리에 기독학생반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믿음이 그렇게 깊어 보이지는 않던 어느 교회 집사님이던 선생님께서 신앙의 부담감으로 동아리를 만들어 지도교사를 하신 것 같다. 동아리 멤버도 대개 원래 교회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지금은 그런 게 거의 없어졌는데, 나 때는 교회 중고등부 학생회에서 친구 가족을 초청해서 문학의 밤이란 행사를 했었다. 미션스쿨을 중심으로 학교마다 찬양단이 있었다.
우리 학교는 1기 신도시의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설학교였다. 내가 가입한 기독학생반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동아리는 아니었다. 내가 1학년으로 입학했을 때 2학년 선배와 함께 동아리 창단 멤버였다. 그런데 나를 포함하여 기독학생반 일부 멤버는 일주일에 한 번 학교 동아리 활동 가지고는 부족했다. 학교 밖에서 우리끼리 사조직인 찬양단을 만들었다. 그때는 토요일에 오전 수업을 했는데, 청소 끝나고 학교 파한 후 학교 근처 교회를 전전하며 모임을 가졌다. 신앙 활동을 하며, 찬양 연습을 하고, 학교 축제에 나가 CCM을 부르고, 1년에 한두 번 친구 가족을 초청해 찬양콘서트를 했다. 1학년이었지만 찬양단도 2학년 선배와 함께 설립 멤버였다.
신입생일 때부터 소녀와 나는 기독학생반과 찬양단 멤버였고 친구였다. 1학년 땐 소녀에게 특별한 마음이 없었다. 첫사랑 이전이었고 사랑이라고 말할 감정까지는 아니었지만, 기독학생반과 찬양단에서 활동했던 다른 여학생을 좋아했었다.
1학년 때 소녀는 찬양단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었다. 소녀는 단지 교회와 학교에서만 활동한 것이 아니라, 안양 지역 광역 청소년 찬양단 멤버이기도 했다. 찬양단은 찬양뿐 아니라 율동도 했는데, 율동 안무 지도도 했다. 막 창단한 찬양단이라 연주할 세션이 없었는데, 소녀가 자기가 활동하는 광역 찬양단의 날라다니는 세션맨 오빠들을 모셔왔다. 우리끼리 만든 신생 찬양단이라 리더십이 부재했는데, 콘서트를 앞두고는 소녀가 아는 오빠를 감독으로 외부에서 영입해 오기도 했다.
2학년이 되었고, 소녀가 기독학생반 회장이 되었고, 내가 부회장이 되었다. 민주적 절차로 투표한 결과였다. 소녀는 기독학생반과 광역 찬양단 활동으로 바빠져 찬양단 활동은 소홀하게 되었다. 나도 찬양단에 재미를 잃어버리고 더 이상 발이 가지는 않았다.
기독학생반 임원 활동으로 쉬는시간 학교에서 매일 같이 만났다. 둘이서 만난 것은 아니었고, 임원단이 있었고, 소녀와 몰려다니는 무리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소녀와 손편지를 주고받았다. 먼저 보낸 것은 소녀였고, 나는 답장으로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과 형식이 표면적으로는 동아리 회장 부회장으로서의 의사소통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때는 카톡이 없었던 시절이라, 손편지 왕래가 흔했다. 또 소녀는 학교와 교회 동네에서만 논 게 아니라, 광역 무대에서 놀던 애라, 주변에 남녀 가리지 않고 꼬였고, 그런 문화가 자연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