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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2

by 최다함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던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사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 사랑처럼 나는 소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 큰 외삼촌과 큰 이모는 부자였다. 큰 외삼촌 댁은 방배동의 잔디 마당이 있는 2층 짜리 단독주택이었고, 큰 이모 댁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였다. 두 집 다 재개발 재건축이 되어 수도권으로 이주하신 지 오래다. 큰 외삼촌 댁은 아들 딸, 큰 이모 댁도 아들 딸, 같은 또래였다. 우리 집은 아들 아들, 작은 이모 댁은 딸 딸, 같은 또래였다. 큰 외삼촌, 큰 이모 댁 사촌 형들과 우리는 터울이 좀 있었다. 공부하느라 못 쓰게 된 부잣집 장난감이 우리 집으로 왔다. 글러브 공 그리고 방망이 정도는 일반 가정에도 있을 수 있다. 포수 글러브, 포수 마스크, 포수 가슴 보호대까지 포함한 풀세트였다. 그때가 부모님이 부부교사라 섬 백령도에 있을 때인데, 같은 학교 아이들이랑 학교 운동장 사이드에서 야구를 했는데, 내가 야구장비 풀세트 주인이라서 야구팀 선수 겸 감독을 했다.


만화를 보는 것은 평범하지만, 사촌 형은 부자라 만화를 사서 집에다 쌓아 놓고 보았다. 사촌형 집에 있던 이현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6권이 우리 집으로 왔다. 같은 반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빌려 갔는데, 그 친구의 친구가 외국으로 이민 가면서 가져갔다나. 학교에 가서 공부하기 전에 성경 한 장 읽고 기도하고 공부하던 나에게,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또 하나의 바이블이 되었다. 읽고 또 읽었다. 수도 없이 읽었다. 자신의 인생이 파멸에 이르기까지 엄지를 사랑한 까지처럼 소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소나기가 내리면 청소시간에 비를 맞으며 달려가 집에서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집이 학교 정문에서 횡단보도 하나 건너 바로 이기는 했다. 학교는 남녀공학이었지만, 학급은 남녀각반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우산을 가져다 소녀의 반 앞에서 소녀를 불러 우산을 주었다. 그때는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을 했다. 학교 파하고 기독학생반과 찬양단 친구들은 학교 앞 교회에 들려 기도를 하고 집에 돌아갔는데, 학교 앞 교회 뒤편 벽에 내가 준 우산이 기대어 있었다.


2학년 5월에 학교에서 야영을 갔다. 야영지가 서울대공원 캠핑장이었는데, 선생님은 5월 초지만 아침에는 겨울처럼 춥다고 단단히 준비하고 가라고 했지만, 대개 다른 애들은 선생님 말은 귓등으로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 나도 나만 생각했었더라면 그렇게 갔을 것이다. 배낭에다 나를 위한 파랑 침낭과 소녀를 위한 파랑 겨울 파카를 넣었다. 캠핑 조 분담 물품도 넣어야 했는데, 상당히 컸던 배낭도 소화하지 못하여, 도마 코펠 등을 배낭 외부에 매달고 갔던 기억이 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추웠다. 다른 친구들이 없던 준비가 나는 두 배로 되어 있었다. 소녀의 텐트로 가서 소녀에게 주었다. 소녀는 고맙다고 했다. 소녀의 텐트에는 다른 남자 애들이 들어와 놀고 있었다.


소녀의 꿈은 CCM 가수였다. 찬양사역자라고도 한다. CCM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은 대중음악 형식의 기독교 음악이다. 집에서 반대를 했고, 점심시간 저녁시간에 쉬는 시간에 미리 도시락을 먹고 음악실을 빌려 연습을 했다. 소녀가 연습하고 있던 음악실에 뒤에 앉았다 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교무실에서 열쇠를 가져오고 가져다주기도 했다. 소녀가 쉬는 시간 연습하던 음악실에 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소녀랑 항상 함께 다니는 무리들이 있었고, 친하게 지내던 다른 남자 애들 몇도 있었다.


소녀의 생일에 선물로 주려고 작은 노트북을 사서 1년 동안 매일매일 편지를 썼다. 장르는 소설 시 에세이 다양했다. 그림도 그렸다. 소설 내용이 마귀할멈이 거울에게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 누구니?" 했는데 순진한 거울이 거짓말을 못하고 "소녀가 제일 예뻐요." 했다가 거울이 깨지고 말았다는 그런 이야기다. 손글씨로 매일 같이 써 한 권의 책이 되었는데 결국 전달하지 못했다. 대신 두꺼운 8절 색도화지로 엄청 큰 생일카드를 만들었다. 색종이도 붙이고. 그림도 그리고. 뭐라고 썼는지, 뭘 그렸는지, 그런 것은 전혀 기억에 없다. 그때까지는 직접적으로 사랑한다 말하지는 않았다. 내 마음만큼 큰 종이에, 내 마음만큼 다양한 색깔로, 내 마음만큼 정성스러운 글씨로.


고2 1년 동안 기독학생반 동아리 임원 활동으로 매일 같이 보았다. 그렇지만 3학년 입시지옥에 들어가면 사실상 볼 수 없었다. 3학년이 되기 전 2월의 마지막 음악실에서 소녀에게 고백했다. 소녀는 몰랐다고 했다. 사귀는 사람이 있고 진지하게 생각해서 결혼을 생각한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나이에 첫사랑은 다 결혼까지 생각하지만, 백이면 백 다 깨지고, 소녀도 결국 그 예외는 아니었던 것으로 훗날에 들었다. 나와 같은 경우에는 사랑을 하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소녀를 향한 나의 사랑에 끝이란 개념은 없었다. 소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소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더라도 이름과 얼굴이 다른 소녀였을 테니까. 사랑이 곧 결혼은 아닌데, 사랑에 끝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혼은 사랑의 종점이 아닌 경유지에 불과했다.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랑이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사랑에 빠진 많은 연인들의 사랑이 그러하고, 그때 소녀의 사랑도 그러했을 것이다. 소녀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녀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미 진행된 마음을 멈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 그런 개념은 아니고. 내가 소녀를 사랑해야지 의도와 의지를 가지고 시작한 사랑이 아니었듯이, Automatically 자동으로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듯이, 고장난 내 심장의 박동을 멈추는 방법을 나는 진정 몰랐다.


고3 때는 동아리 활동도 끝나고 입시 때문에 학교의 같은 층에서 공부하면서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졸업을 하고는 더더욱 그랬다. 소녀와 나 둘 다 재수를 했다. 소녀는 재수를 하며, CCM 가수의 꿈을 포기하고, 예체능에서 인문계에서 갈아탔다. 집안의 반대를 이기지 못했는지, 다른 꿈을 꾸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알 필요도 없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소녀는 동네 재수학원에 다녔다. 나는 노량진 일타강사 출신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기숙학원에 들어갔다. 일타강타 출신 목사님은 학원강사로서의 인지도는 우리 중 아무도 몰랐지만, 그 절친이 밑줄 쫙 국어 서한샘이었다. 학원 행사 때마다 서한샘 씨가 왔다 갔다. 서한샘 씨도 대중에게 인지도가 있었다는 것이지, 우리 때 선생님은 아니었다. 소녀가 동네 재수학원에 다니는 줄 알았더라면, 나도 그 재수학원에 다녔을 것이다. 소녀는 인서울 대학에 갔고, 나는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에 갔는데, 대학 대신 과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소녀가 간 대학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고, 유튜브를 보다 알게 된 사실인데, 고등학교 커플 중 성적이 좋은 애가 성적이 낮은 연인을 따라 낮추어 진학하는 경우도 실제로 있다고.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기보다는 비극이라고.


고3이 이후에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졸업을 한 이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재수할 때 길에서 한 번 마주쳤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못 보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3월 춘천 자취방에서 소녀에게 전화를 했다. 여전히 소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다고. 인생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냥 그 사실만 기억하고 있어 달라고.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컴퓨터 수업을 주로 들었다. HTML로 홈페이지 만드는 수업이었다. 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웹디자인을 배웠다. 소녀에게 나의 마음을 고백하는 홈페이지를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기 전에 소녀에게 나의 마음을 담은 홈페이지 주소를 보냈다. 홈페이지의 이름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홈페이지 주제와 사용한 이미지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어린 왕자'를 섞었다. 1년을 준비했지만 지금 시대 기준에 비추면 조잡했다. 같은 학과 동기들 군대 갈 때, 2학년 마치고 가도 되는데, 1학년 마치고 군대에 갔다. 군대 간다고 하면 소녀랑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그 정신을 가지고 군대에 갔다. 하필 대한민국에서 가장 추운 곳 중 하나에 가장 추운 계절에 갔고, 하필 훈련을 마치고 배치받은 자대는 강원도 양구의 험준산령을 매일 타 다녔다. 군 입대 3개월 만에 조울증이 발병했다. 고2 소녀가 내 마음에 들어오고 나서, 매일 매 순간 나는 소녀를 생각했다. 지금 내가 매일 매 순간 글쓰기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4년이 지나서 조울증이 발병했다. 그리고 3년이 더 지나서야 내 마음에서 소녀가 떠나갔다. 소녀가 내 마음에 들어와 떠나기까지 7년이 걸렸다. 고2 딱 1년 동안 매일처럼 만나 동아리 활동을 하고, 고3 때는 같은 학교 같은 층에 있었지만 사실상 볼 수 없었고, 졸업 이후 한 번 스친 것 외에는 단 한 번도 소녀를 만난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순전히 내 입장과 시각에서이다. 조울증에 걸리기 이전까지는 내 마음을 소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타이밍이 왔을 때 내 마음을 한 번 이야기했고, 적정한 거리를 두고 멀리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거리와 시간이 소녀를 향한 나의 마음을 식게 만들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조울증 후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질척댔다. 몇 번 전화를 하고, 몇 번 이메일을 보냈던 것뿐인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바로 마음을 놓아야 한다. 더 이상 가면 안 된다. 나를 위해서도. 상대를 위해서도. 주변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도. 나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아니니 끝까지 사랑할 필요도 죽기까지 사랑할 필요도 없다.


소녀보다 나를 더 사랑했었더라면. 내 꿈을 더 사랑했었더라면. 그러면 꿈꾸는 내 모습을 사랑하는 예쁜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겠지. 세상은 넓고 예쁘고 착한 여자는 많지는 않은데 동네에 한 명은 아니 두 명은 있다. 내가 바라보는 여자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그 옆에 있던 다른 여자를 바라보았더라면 눈이 맞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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