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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Feb 03. 2021

아리따운꽃

2000년 1월 11일 춘천 102 보충대로 입대하였다. 신병의 다수는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은 후 자대 배치를 받지만, 일부 신병은 보충대로 입대하여 3박 4일 정도 대기하다가, 보충대에서 사단을 배정받아 사단 훈련소로 배치되었다. 춘천 102 보충대를 마지막으로 전국의 보충대가 해체되어 이제는 없다. 지금은 논산훈련소가 아닌 보충대를 거쳐 입대했던 신병들이 보충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사단 훈련소로 들어간다. 입대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내 생일이 1월 10일이었고, 바로 그다음 날 1월 11일에 입대했기 때문이다. 입대 며칠 전 주변에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 부모님이나 가족에게나 다른 불만이 있어서 가출한 것은 아니었고, 군입대를 앞두고 첫사랑 소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어 혼자 바람 쐬러 떠났다. 군대 가기 전 떠난 여행이었는데, 아무에게도 연락을 남기지 않고 떠났기 때문에 가출이 되어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그 당시 행적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학교 다니며 자취하던 춘천에서 버스를 타고 강릉에 갔다가, 강릉에서 동해에 가서 친구를 만난 후, 동해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역까지 내려갔다가, 부산에서 서울역 찍고 당시 살던 평촌 집으로 귀환했다.


며칠 동안 길에서 자고, PC 방에서 잤다. 집에서는 가출도 그 자체보다 군대 가는 날까지 안 돌아올까 봐 걱정하셨다. 물론 나는 계획한 여행 본래 일정대로 군대 가기 바로 전날 집으로 돌아왔다입대 전날 늦게라도 집에 들어와서 그때서야 부모님께서는 마음을 놓으시고 다음 날 군대 가는 아들을 위해서 환송을 해주시고 생일 축하 파티를 해주셨다. 조울증이 걸리기 전 1학년 때도 학과 공부와 활동에 열심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다니던 강원대 영어교육과 자체가 워낙 작은 과였고, 과 동기 중 내가 제일 먼저 군대에 가서 그랬는지, 몇몇 여학생들을 포함하여 같은 과 친구와 선배가 군대 잘 가라고 입대한 춘천 102 보충대로 응원 와 주었다. 입대 장소가 학교가 있던 춘천이라 그랬을 수도 있고, 같은 과 선배 형이 같은 날 같은 보충대로 입소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잘 모른다.




군대에서 조울증에 걸렸고, 군입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조울증으로 전역하였다. 군의관 선생님께서는 제대 후 반드시 병원에 다니며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셨지만, 부모님도 나도 조울증이 어떤 질환인지 잘 몰랐다. 약을 먹으면 괜찮고, 안 먹으면 안 괜찮은 질병인데, 약을 먹다 끊다 하여 조울증이 반복하여 재발되었다. 제대한 이듬해 봄 바로 복학하였다. 1학년 때는 교양수업을 주로 들었고, 2학년 때는 영어 연극과 스피치 공연을 하는 것이 우리 영어교육과의 가장 중요한 연래 행사였다. 2학년 1학기 초부터 팀을 짜서 준비하여, 2학기 때 지인들 초청하여 영어 연극 공연을 하고 스피치 콘테스트를 하는 것이, 우리 과 4년 가운데 가장 큰 축제이자 행사였다. 배역을 맡아 놓고 학교도 나오지 않고 연습에도 나오지 않으니, 같은 학년 후배들과 복학한 선배들이 나를 찾으러 내가 살던 선교단체 기숙사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조울증에 걸리기 전 1학년 때는 공부 안 하고 낭만을 즐기는 보통의 1학년 남학생들처럼 학사경고는 면할 정도의 성적이었는데, 2학년 때는 학사경고가 아니라 1 2학기를 ALL F 0.0을 받았다. 우리 대학 우리 과는 학사경고를 몇 차례 받거나 ALL F를 받는다고 제적되지는 않았다. 등록금만 낸다고 졸업시켜 주는 학교도 아니었지만, 매 학기 등록금 내고 졸업 학점을 이수하면 언제라도 졸업이 가능했다. 졸업하기까지 13년 반이 걸렸다. ALL F를 받은 학년이 2001년 1 2학기 만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수차례 반복되었다. 반복이 되어도 부모님께서는 끝없이 믿어 주셨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보여드린 나에 대한 믿음이 있으셨지만, 부모님 또한 그때는 조울증에 대해 잘 모르셨다. 부모님께서 상황을 파악하시고 2002년도에 휴학을 시키시고 집으로 데려 오셨다. 집에서 요양을 하다가 파리바게트에서 알바를 했다. 빵 이름과 빵 가격을 빨리 외우지 못하여 가게 사장님 부부과 빵 굽는 누나와 다른 알바에게 구박을 많이 받았다. 지금이야 바코드만 찍으면 포스에 바로 뜨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2003년이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나를 춘천의 대학교에 다시 혼자 복학시키면 똑같은 과정이 반복될 것 같으셨다. 졸업이나 할 수 있을까 싶으셔서, 학점 은행제였던 숭실대 전산원에 보내셨다. 강원대 영어교육과 학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강원대 영어교육과를 그만두기 까지는 전산원 학점을 학점은행제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한창 배울 나이에 집에서 놀리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일단 숭실대 전산원 보내 놓고, 강원대 영어교육과 내려놓고 전산원 졸업을 시키던가, 나중에 상황 봐서 춘천의 학교로 돌려보낼까, 두 가지 모두 고민하셨다. 두 학교를 비교해보면, 숭실대 전산원이야 면접 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고, 강원대 영어교육과는 지방이지만 비전 있는 사범대 영어교육과였기 때문에 쉽게 접을 수도 없었다.


전산원에 가서는 공부를 잘했다. 반에서 TOP을 다투었다. 넘을 수 없는 친구 한 명 있기는 했다. 대부분은 과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1학년이 프로그래밍 공부를 한다고 해도, 그 지식으로 프로그램을 실제로 짤 수 없다. 그 가운데 비범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수업시간에 배우지 않는 것을 자기가 찾아서, 실제로 의미가 있는 코딩을 하는 친구가 하나 있다. 전산원에서 TOP을 달렸다고 하지만, 다른 동기들과 별반 차이 없었는데, 그 친구만 저 앞으로 앞서 나갔다. 보통 전산원 이후 바로 취업보다는 편입을 고민하는데, 그 친구는 바로 일본으로 취직하였다. 얼굴도 잘 생기고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해병대 나온 상남자였는데, 일본에 취업했고 일본 여자와 결혼을 했다. 나와도 친하게 지냈다. 둘이서 열정이 넘치셨던 어느 교수님 한 분을 함께 수업 외 시간에 따라다니면서 별도의 과외 공부를 받았었다.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다녔고, 그 친구는 무슨 소리인지 다 이해하면서 따라다닌 차이였다.


숭실대 전산원 1년을 다니면서 성적도 매우 좋고 다시 회복되어서, 학점은 인정받을 수 있으나 학원이나 마찬가지인 전산원을 접고, 강원대 영어교육과로 복귀했다. 그때 강원대 영어교육과를 접고, 집에서 전산원 2년 다니고 컴퓨터공학과로 편입해서 프로그래머로서 커리어를 쌓았으면, 지금 스마트폰 앱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원대 영어교육과와 숭실대 전산원을 단순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조울증을 아직 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춘천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전산원에 들어간 2003년 3월에 7년 만에 드디어 내 마음속의 소녀가 떠나 버렸다. 전산원 다니기 시작했을 때 같은 반 여학생 한 명이 예뻤다. 그 여학생은 그 당시 내가 보기에 카사노바 같은 친구와 눈이 맞았다. 지금이야 그 카사노바가 매력이 있었다고 인정하지만, 그때는 왜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나를 놓아두고 카사노바랑 사귀나 싶었다. 지금은 납득이 간다. 보통 남녀관계는 밝은 교회당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싶은 이성과 사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두침침하고 좁은 골목을 함께 걷고 싶은 이성과 사귀고 싶은 것이다. 예쁘고 착한 자매님에게 전도하고 성경공부 같이 하면서 작업을 거는 형제님을 보기는 했다. 카사노바와 사귀었던 여학생에게 깊이 빠졌던 것은 아니다. 바로 마음을 접었다. 큰 의미가 있었던 바람은 아니었으나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면서, 병원 잘 다니고 약 잘 먹고 조울증을 잘 관리하면서, 소녀에 대한 비정상적으로 증폭된 그리움과 사랑이 드디어 마무리가 되었다. 내가 전산원 카사노바라고 지칭한 옛 친구에 대해서 지금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냥 웃자는 의미로 카사노바라고 지칭한 것이지 유감은 없다. 




2004년 춘천 학교로 돌아갔고 복학을 했다. 집에서 파리바게트 아르바이트하고 전산원 다니는 동안 완전히 회복되어, 2004년 2005년은 학과 생활도 잘했고, 학점도 잘 나왔다. 2005년 교회를 옮겼다. 춘천교대 귀퉁이에 쪽문 하나가 있었고, 그 쪽문 근처에는 교회 하나가 있다. 설립 목사님께서 교대생들을 중심으로 사역하시면서 세운 교회이다. 그 교회에 갔을 때는 마침 설립 목사님께서 미국으로 유학 가시면서 교회를 떠나시고, 2대 담임 목사님께서 부임하여 오셨던 때였다. 그때 나는 믿음으로 교회를 다니던 때는 아니었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환경에 따라 교회를 맴도는 선데이 크리스천 나일롱 신자였다. 믿음으로 그 교회를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교대생들이 많은 교회이니 예쁘고 착한 교대 여학생이 있겠구나 하고 여자를 사귀러 교회를 옮겼다.


교회에 갔던 바로 그날이었는지 앞에 나가서 자기소개를 했는데, 한 교대생 여학생이 다가와서 먼저 인사하며 이름이 참 좋다고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첫사랑 7년 그 사이에도 그 이후에도 중간중간 설레는 사람이 있었기는 하지만, 두 번째 운명적인 사랑이었다. 이때까지는 외모를 보지 않았고, 마음의 중심만 보았을 때였다. 마음의 중심이 겉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지, 마음 심연의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첫사랑의 코드명이 소녀였다면, 그 교대생의 코드명은 아리따운꽃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오지 중 오지에서도 읍내에서 한참 들어가는 오지 출신이었다. 중간에 아들이 하나 낀 1남 6녀 7남매 중 여섯째였다. 우리 시대에 찾아볼 수 없었던 환경에서 자란 친구였다. 초등학교 때 내일이 중간고사여서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집에서 소를 몰아야 해서 혼자 울었다는 기억을 가진 친구였다. 나의 자작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엽서에 적어주면서, 친구 하자고 오빠 동생 하자고 했다. 그 친구도 그러자고는 했다. 내가 말한 친구 오빠 동생과 그쪽에서 받아들인 그것은 다른 의미였다.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교회 오빠로서 곁에 있어 주었다면, 인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친구를 깊이 진심으로 좋아했지만, 조증이 찾아와 내 마음이 조절이 안 될 때는, 때때로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실수를 했었지 싶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순간에는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데 들이대기도 했었다. 조울증 때문에 그런 것도 있고, 사랑이란 게 상대가 아니라고 거절을 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멈추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이 아닌 혼자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날 사랑하지 않는 상대는 더 사랑해서도 안 되고 더 사랑할 필요도 없다. 사랑을 놓으면 다른 사랑이 찾아온다. 그런데 사랑의 한가운데서는 그게 내 마음대로 잘 안 된다. 조울증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도 있고, 내가 사랑의 기술을 잘 몰랐었던 것도 있지만, 사랑에 속성이 원래 그렇기도 하다. 어떤 사랑은 내 의지에 의해 시작되지도, 내 의지에 의해 멈추어지지도 않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사랑한 상대방이 No 할 때 그 사랑을 놓을 수 있는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


아리따운꽃은 예수님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한참 신앙에 불이 붙었던 때였다. 아리따운꽃과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 당시 내가 살던 강원대 근처에서 상당히 거리가 있었던 춘천교대 뒤에 있던 교회까지 새벽기도를 나갔다. 아리따운꽃도 새벽기도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리따운꽃은 올곧은 친구였다. 자신이 존경할 수 있는 그런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니라는 거절이었다. 존경할 만해 보이지 않은 시시껄렁한 남자랑 친하게 지내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남녀 간에 불꽃이 이성적인 이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끌리고 느끼면 끝난다. 이렇게 존경할 만한 남자와 사귈 거라고 다짐해도, 전혀 생뚱맞은 인물에게 심장이 뛰기도 하는 게 사랑이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사랑에 휩쓸려 만나지 말아야 할 악연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조증 에피소드 과대망상이 찾아왔다. 설명할 수 없는 과대망상이 찾아왔다. 아리따운꽃은 서태지 매니아였다. 나의 큰 이모부 절친이 서태지 아버지였다. 큰 이모부 절친이 서태지의 아버지라고 해서, 내가 서태지와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다. 나는 서태지랑 어떤 의미 있는 일을 도모해서 친해지고 싶었다. 아리따운꽃과 서태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서태지의 광팬이었던 아리따운꽃과 서태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곁에 있고 싶었다.


아리따운꽃을 사랑하며 조증이 찾아왔을 때 또 다른 과대망상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대한민국의 오지 중 오지였던 아리따운꽃의 부모님께서 살고 계시는 그 지자체 그 마을에 <아리따운꽃 더불어숲> 이라는 숲이자 생태관광단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아리따운꽃의 고향을 세계적인 생태관광지로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조울증의 과대망상도 환자마다 다른데, 나의 과대망상은 상당히 정치적인 측면이 있었다. 내가 세상에 슬픔을 구원하는 정치적 메시아가 되고 싶어 하는 과대망상이었다. 조증 상태의 과대망상도 전혀 없는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숨어 잠자고 있는 욕망이 증폭되어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하루는 백 통이 넘는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남긴 적이 있다. 변명할 거리는 있다. 메시지 폭탄을 보내기 이전에, 아리따운꽃이 이러이러한 이유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상당히 많은 숫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쪽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 또한 다량의 메시지를 보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쪽에서 나에게 이렇게 했다고, 나도 그 저쪽에게 똑같이 하면 안 된다. 




조울증 전에는 내 감정을 앞세우지 않으려고 상대방을 존중했다. 조울증 이후에는 조증으로 과장되고 증폭된 감정에 휩싸여서 상대를 배려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다방면으로 재능도 있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아리따운꽃은 임용고사에서 2번 떨어졌다. 아주 오래된 소식이다. 지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을 수도 있고, 다른 재능이 많으니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원하지 않는 마음으로 혹시 괴로운 기억이 남겼다면, 노여움을 풀어달라고 이제 와서 사과하고 싶지도 사과할 수도 없다. 내가 성공하여 빛나는 인물이 되어 과거에 저런 사람이 나를 아프도록 짝사랑했구나 하고 나의 옛 아리따운꽃에게 추억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숭실대 전산원에서 복학한 후 한동안 건강했고 성적도 잘 나왔다. 아리따운꽃을 마음에 품게 되면서 다시 서서히 무너졌다. 한 번에 무너진 것은 아니다. 서서히 무너졌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이 썩을 때까지 참지 말고 "나 너 좋아해." 고백하고, 아니라고 하면 쿨하게 털어 버리고 제 갈 길을 갔어야 했다. 나중에 그쪽에서 "오빠" 하고 먼저 팔짱을 낄 수도 있다. 스스로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마음이 산산이 무너져 있었다. 고백을 하고 거절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 방법을 몰랐었을 뿐이다. 날 사랑하지 않는 상대는 사랑해서는 안 되고, 사랑할 필요도 없다. 한 사랑이 지나가면, 반드시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다.


항상 여자만 생각했던 것도 아니다. 조울증이 시작된 스물한 살 때부터 항상 조증 상태에 있었던 또한 아니다. 대부분 멀쩡했는데 이상할 때가 가끔 있었던 것이다. 멀쩡한 모습만 보여주면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가끔 이상한 모습도 번갈아 보여주었을 뿐이다. 어떤 여자도 그런 남자에게 신뢰와 사랑을 느낄 리가 없다. 남자도 여자에게 마찬가지이다. 멀쩡한 여자라도 아파서 가끔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면, 남자들도 도망간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아픈 것을 알면서도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상대도 어쩌다 아주 어쩌다 한 명 있다. 나의 끝사랑 나의 아내 에미마가 나에게 그랬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여자에 사랑에 목숨 걸지 않을 것이다. 내 갈 길을 갈 것이다. 혼자만의 마음이 생기면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훌훌 털어버릴 것이다. 내가 해야 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알바로 영어 과외를 해서 돈을 벌고, 학과 생활과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할 거이다. 내 곁을 맴도는 여자가 나타나면, 그 여자 가운데 가장 예쁘고 착한 내 눈에 사랑스러운 여자와 사귈 것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절대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1도 없다. 상사병과 조울증으로 2030 20년의 청춘을 잃어버리고 개털이 되었지만, 사랑의 끝에서 나의 사랑 에미마를 마침내 만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동생이 사장인 회사에 취직하여 일하고 있고, 회사가 끝나면 글을 쓰고 있고, 나와 아내의 사랑의 열매인 우리의 아가가 세상에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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