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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Feb 02. 2021

사랑이 끝나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다

첫사랑 소녀를 향한 7년 간의 짝사랑도 끝이 났다. 그렇다고 하여 그 사이 다른 여자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소녀와 기독학생반 회장 부회장 활동을 하며 친하게 지낸 것은 고2 때 단 1년뿐이었다. 고3 때는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거의 보지 못했다. 졸업 이후에는 길에서 딱 한 번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 이후 몇 번 전화를 하고, 몇 번 이메일을 보내고, 몇 개의 싸이월드 댓글을 남기고 나서는 모든 연락이 끊어졌다.  이상 소녀와 연락조차 할 수 없도록 완전히 인연이 끊겼다. 그 이후로도 한참 후에야 소녀가 마음속에서 완전히 떠나갔지만, 소녀가 내 마음에 있는 동안에도, 소녀와 서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에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예쁘고 착한 여자에게 흔들렸다.




같은 학과 같은 학번 동기 중 엄마 같은 연상의 누나가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교대를 다니다가 우리 과에 들어왔다고 들었다. 사범대 다니다 교대 가는 케이스는 있어도, 교대 다니다 사범대 오는 케이스를 적이 없었다. 사범대가 나빠서가 아니라, 초등임용고사가 중등임용고사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나에게만 엄마 같은 존재는 아니었고, 우리 과 전체에서 그런 존재였다. 조울증 증상으로 내 정신이 제정신이 아닐 때, 누군가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을 때, 누나를 아주 잠깐 여자로 느꼈 때가 있었다. 바로 마음을 정리하고 가끔 이메일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누나 동생으로 지냈다. 13년 반 만에 겨우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까지도, 가끔 이메일을 보내면 답장이 오며 안부를 주고받았었는데, 그 이후 소식이 끊겨 한동안 누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 수 었다. 얼마 전 다시 이메일을 보냈고, 누나의 고향집에서 집 앞에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 하며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귀는 사이도 썸 타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자주 만나 밥 먹고 이야기하는 여자 사람 친구 여사친도 있었다. 여사친은 79년 생이었고, 나는 빠른 80년 생이었다. 여사친은 선교단체 예수전도단이었는데, 나에게 전도를 하려다가 알게 되고 친구가 되었. 여사친은 간호학과 학생이었다. 목사님 딸이었고 정신적으로 아픈 동생이 있어서, 목사님 아들이면서 조울증을 앓고 있던 나에게 연민의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자 친구도 아닌 그냥 여사친이었는데, 나 없이  어머니와 전화도 하고 만나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어머니는 여사친이 며느리가 되었으면 하고 내심 바라셨는지도 모른다. 여사친이 날 남자로 보기에는 상사병과 조울증으로 나사가 몇 개 빠져 있던 시기였다.


내가 1년 재수하고 입학해서 여사친이 나보다 한 학번 위였고 나보다 한 살이 많았기 때문에 여사친은 나를 동생으로 대하려고 했고, 나는 초중를 같은 나이로 다녔기 때문에 친구로 대하려고 했다. 여사친은 나에게 누나가 되기를 원하고, 나는 여사친이 친구가 되어 야자 하기를 원하는, 기싸움을 하기도 했다.


아주 잠깐 여사친이 여자로 느껴지고 설렘을 느낄 때가 있었, 여사친 곁에는 현재 남편인 썸을 타는 남자가 있었다. 나와 여사친은 형제자매처럼 베스트 프랜드처럼 가깝게 지냈지만 남녀관계는 아니었다. 남자는 여사친을 여자로 느끼기 쉽지만, 여자는 특별한 사건과 계기가 없는 이상 남사친은 계속 남사친이다. 여사친의 결혼식 날 아침까지는 가기로 생각하고 외출을 했다. 갑자기 가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서 가지 않았다. 목사님이 된 남편과 아프리카 어디로 선교사로 갔었고, 아이가 생겼다고 들었다. 그 이후 폰 번호를 바꾸고 연락처를 잃어버렸다. 더 이상 선이 닿지 않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의 청춘은 세상에 없는 사랑이라는 무지개를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 7년의 사랑이 끝나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했다. 사랑했던 모든 여자가 운명 같은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을 찾아 떠난 여행 중 지나갔던 모든 마을에 나의 심장을 훔쳐 갈 만한 여신이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여자에게 한 번에 한 명씩 끊임없이 설렘을 느꼈지만, 아내 에미마를 만나기까지 운명적인 사랑이었던 여자들은, 첫사랑을 시작으로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근 20년 동안 5명이었다. 모두 짝사랑이었지만 마지막 사랑 아내를 만나기 전, 운명적이었던 사랑의 숫자가 5명 정도가 된다는 것은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니다. 나의 청춘 시절 누군가 사랑할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가정하면, 마흔 즈음돼서야 아내를 만나기 전에 운명적으로 느껴졌던 이성이 5명이라는 것은 피 끓는 청춘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첫사랑이 잘 되었다면,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되었을 것이고, 두 번째 사랑이 잘 되었더라면 두 번째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되었을 것이다. 사랑이 곧 결혼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던 그 순간에는 그 사랑의 유통기한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랑은 결혼이라는 주의도 아니었지만, 사랑에 한가운데서 사랑은 언제 영원할 것만 같았다. 결혼이란 점을 찍고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끝까지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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