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 해를 마무리 지으며 나는 작가의 꿈을 접기로 했다. 2015년 봄 에세이 작가가 되기로 한지 10년 만이었다. 직업으로서의 작가의 꿈을 접겠다는 것이었지, 브런치 1일 1글 글쓰기 목표의 의지는 더욱 불태웠다. 2020년 10월 12번 떨어지고 12번째 브런치 작가가 된 이후로 1000개가 넘는 많은 글을 썼지만, 늘 다짐만 하고 항상 깨지던 목표였다. 작가는 포기하지만 글은 포기할 수 없었다. 작가로서 나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글쓰기에 대한 사랑 둘이 공존했다. 이미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미 나는 작가였다.
2015년이 나의 작가의 꿈의 시작은 아니었다. 스무 살 조울증에 걸려 방황하다 2012년 여름 13년 반 만에 졸업했다. 사실 2009년 봄학기 교생실습만을 마치고 그해 여름 졸업 예정이었다. 그 직전 해 2009년 난 영어교육과 수업 대신 국어국문학과 수업 4과목을 들었다. 전공 수업은 조울증 모드에 들어가면 때때로 F를 깔기도 했는데, 국어국문학과 수업은 A0 아니면 A+였다. 소설창작, 시창작, 한국현대문학사상, 국어방언학 수업을 들었다. 소설창작 시창작은 그렇다 치고, 한국현대문학사상도 그렇다 치고, 국어방언학을 들은 이유는 소설을 쓸 때 사투리의 리얼리티를 위해서였는데, 사실 아무 관련 없는 수업이었다. 전공생도 아닌 비전공생인데 각각 다른 과 비전공생들과 팀을 이루어 시골에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방언 인터뷰 따느라 애 먹었다. 대신 전공생도 아닌데 교양 강의도 아닌데, A+ 먹었다. 한국현대문학사상 수업은 문인이 되려면 한국 문인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문인 한 명을 정해 소논문을 써 발표하는 수업이라 고생했다. 사실 당시 문태준 시인에게 관심이 있었는데, 가재미로 주목을 받았지만 시집 한 권 나온 신인일 때라 연구자료가 없을 때였다. 서점에 평론집이 있던 노작가 소설가 한승원 작가에 대한 소논문을 써 발표했는데, 한승원 작가는 훗날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아버지로 더 큰 명성을 날린다. 그때 나는 문학청년이었다. 물론 조울증 기운이 충만할 때라 붕붕 떠다녔지 문학의 기본을 다지지는 못했다.
시인 또는 소설가 순수문학 작가가 되어야 하겠다고 결단한 계기가 남다르다. 나는 1996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된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 친구였던 소녀를 짝사랑한 죄로 상사병에 걸리고 조울증에 걸리고 인생 제대로 조졌다. 소녀를 내 마음으로부터 떠나보내기까지 7년의 세월이 걸렸다. 두 번째 사랑은 2005년으로 기억한다. 교대 뒤에 교회가 있었는데, 교대 여학생 만나보러 갔다가 피 봤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랑이 바로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신이었는데. TV 드라마에서 본 배우 한효주였다. 작가가 되면 한효주랑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고, CGV에서 영화 보고, 정동진 해돋이 열차를 같이 타러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작가는 그렇지 못하지만. 작가 중의 작가가 되면 되니까. 다른 이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내겐 그게 가능해 보였다. 그렇지만 그런 의도로 시작된 작가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효주 만나려고 소설 시 창작 수업 듣고 문인의 꿈을 꾸웠던 것은 아니다. 조울증에 걸리고 작가가 되어야 사람처럼 살 것 같았다.
첫 시를 지은 것은 2000년 봄 군대에서 조울증에 걸려 6개월도 안 되어 군대에서 쫓겨난 그해 여름이었다.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 나의 인생 시, 나의 대표 시다. 그 이후 25년간 시 다운 시는 없었다. 최근 내가 쓴 <달의 여신 루나> 연작이 아마도 그 시를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 싶다. 이후에 그런 급의 시가 더 나올지 말지는 모른다. 가봐야 안다. 지금도 시인이 될 생각은 없으며, 에세이를 쓰며, 시집을 낼 수 있겠다는 마인드지만. 그때 시인이 되려고 시를 지은 것은 아니다. 내 인생의 고약한 친구 조울증이 나를 찾아오며 가지고 온 선물이었다.
학교 다닐 때 일기를 썼고 작문을 했지만, 그것이 나의 자발적인 글쓰기는 아니었다. 나의 자발적인 첫 글쓰기는 첫사랑 소녀를 향한 소수의 보낸 다수의 보내지 못한 편지들이었다. 예쁜 노트 한 권을 사서 매일 한 페이지 씩 일 년을 에세이 시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려 책 한 권이 되었는데, 생일 때 전해주려고 일 년을 썼는데, 결국 보내지 못한 편지 책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내 첫 책이었다. 한 사람을 위해 손으로 쓴. 결국 전해주지 못한.
나의 글은 결국 한 사람을 위한 글로 시작했다. 한 사람을 위한 글은 상징이 되고 훗날 많은 사람을 위한 글이 된다. 나의 글은 그랬다.
2023년 동생 회사를 2년 다니다 그만두었다.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어서 힘들어서 회사 끝나고 집으로 안 들어가고 핸드폰 끄고 부산 해운대에 갔다. 그리고 다음날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회사를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랜 꿈이었던 작가가 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아무 글도 써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아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나의 엉덩이를 의자에 앉혀 글을 쓰는 트레이닝이 되어있지 않아서라고 보는 게 맞다. 작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배수진을 쳤지만, 나는 그냥 생백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고용센터를 찾아가 작가가 되기 전까지 가질 직업을 찾았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어 주간보호센터에서 3개월 일경험을 했는데 회사 사정으로 정규직 연계는 되지 못하고 계약 종료 되었다. 그리고 10개월 가까이 백수였다. 나름 뭐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글도 써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글을 쓰는 습관이 배어 있지 않아서.라고 이 연사 강력히 주장합니다. 네팔 아내 에미마는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조리보조원으로 나 대신 취업을 했다.
2025년 1월 뭐라도 해야 했다. 내 나이에 경력 없어 이력서 없이 할 수 있는 쿠팡 물류센터에 나갔다. 일용직 단기사원으로 3개월 나가다, 계약직 사원이 되었다. 나의 24시간의 3분의 1을 일에 메이니 글은 잘 써졌다. 일이 힘들수록 밤에 잠자는 시간은 줄어들고, 글은 더 많이 써졌다. 어떤 작가지망생의 글쓰기 현장의 신비다. 시간이 많을 때는 글이 안 써지고, 시간이 없을 때는 글이 막 써진다. 낮에는 육체의 힘을 쓰는 쿠팡 물류 일을 하며, 밤에는 정신을 파 먹는 글쓰기 활동을 했다. 회사 끝나면, 글 써야지, 쉬어야지, 그보다 아내와 아들은 나와 보낼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날카로워진다. 그래서 작가가 되는 꿈을 포기하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면서 나는 브런치 1일 1글의 목표를 앞으로의 날에 클리어하기로 다짐했다. 나는 이미 작가가 된 것이다.
나의 글쓰기는 아침에 똥 싼 것까지 쓰는, 극사실주의 하이퍼리얼리즘적 문체를 가지고 있지만, 아침에 똥 싼 이야기를 쓸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있어서 쓰는 것이지, 아무 이유 없이 아침에 똥 싼 이유를 쓰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어떤 이유로 2026년 새해를 맞으며 나는 작가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작가 중 작가, 최다함 내가 브랜드인 작가가 되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