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다함 Mar 01. 2021

목사님이 되지 않은 이유

고등학교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은 내가 목사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에서 중고등부 회장을 했고, 학교에서는 기독학생반 부회장을 했고, 눈을 감고 기도하고 점심밥을 먹었고, 야간 자율학습 때는 성경책을 꺼내 놓고 몇 장 읽고 공부를 시작했고, 혼자 복도나 길을 걸을 때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다녔으니,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고3 때 담임선생님이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때 유명한 미션스쿨을 졸업하여 기독교를 중심으로 모든 종교에 우호적이신 분이셨다. 졸업식 날 학부모들도 있는 마지막 자리에서 나에게 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셨다. 내 기도로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쳤다.


당시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되어야지 하고 딱히 정해 놓은 길은 없었다. 목사님이 될 수도 있었지만, 미래의 진로를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독실한 기독교인 학생과 학부모가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생각했던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첫사랑이란 감정의 개미지옥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내 삶을 살았었더라면, 한동대를 갈 수 있었을 것이고, 한동대 졸업 후 신학대학원을 진학했을지도 모른다. 소녀에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대학에 진학하여 다른 예쁘고 착한 여자가 나의 팔짱을 끼며 "오빠"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었더라면 내 인생의 최고의 사랑 아내 에미마를 만나지 못했을 터이니,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나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고3 때 총신대학교 신학과 원서를 쓰기는 했었다. 신학과 원서는 담임목사님과 교단장의 추천서를 받아야 했다. 동네에서는 나름 큰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담임 목사님을 알고 있었지만, 담임 목사님께서 나를 알고 계셨는지는 모른다.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회장을 하며 교회를 내 집처럼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나, 큰 교회라서 담임목사님을 면전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내가 중고등부 회장을 할 때 담임 목사님 딸이 회계인가 총무인가 임원을 했었기 때문에, 딸을 통해 나를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목사님 딸은 어느 날 갑자기 호주인가 어디로 유학을 떠나더니, 이른 나이 다른 교회 목사님 아들이랑 결혼했다고 풍문으로 들었다. 목사님 딸이 내 눈에 예쁘고 착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 동생이었고 학생회 임원으로 함께 활동하며 교회 오빠 동생으로 지냈을 뿐이다. 내가 사랑했던 소녀 또한 나를 기독학생반 임원이자 친구로서 친하게 지냈을 뿐,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개념과 원리이다.


신학과 원서에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적는 칸이 있었다. 나는 교회 성경공부를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주셨다고 배웠고, 그 말씀에 따라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셨고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다만, 구원의 확신은 있으나 가끔 의심의 구름이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며, 신학과에서 공부하며 그 답을 찾아보겠다고 썼다. 담임목사님께서는 납득이 가는 설명을 주시지 않은 채, 그렇게 쓰면 떨어지니 이러이러하게 고치라고만 말씀하셨다. 담임목사님께서 구원의 확신에 대해 성경공부를 다시 시켜 주시던지, 입학원서는 솔직한 날것의 고백이 아닌 심사 교수가 원하는 답안을 써야 한다는 입시전략을 설명해 주셨어야 했다. 순진했고 순수했던 나는 담임 목사님의 경륜과 선의를 신학교를 가기 위한 거짓말로 오해했다. 담임 목사님과 교단장 목사님 추천서를 폐기하고, 신학과에서 영어교육과로 전공을 바꾸어 총신대에도 원서를 넣기는 했다. 다른데 다 떨어지고 총신대 영어교육과에 추가합격으로 붙었는데 안 가고 재수를 했다. 부모님께는 총신대가 바로  숭실대 화장실 보다 작아서 가고 싶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고 재수를 했다.


꼭 그런 이유만아니었다. 이미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가려고 재수하기로 다짐을 하고, 노량진 입시학원 일타강사 출신의 순복음 교단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는 기숙학원에 입소한 후에 총신대학교 영어교육과 추가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때 나는 한동대 가려고 재수할 것이 아니라, 총신대 영어교육과에 갔어야 했다. 재수를 하고 한동대에는 다시 한번 떨어졌고, 강원대 영어교육과에 갔다. 입학 커트라인으로는 강원대 영어교육과가 총신대 영어교육과 보다 높았는데, 그 시절엔 총신대 영어교육과가 나 개인에게는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원하는 대학 가겠다고 세월과 돈을 들여 1년 더 고생해서 얻을 것이 별로 없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열심히 되었는데, 그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서른 즈음 신앙을 완전히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무신론자가 된 이유는 소녀의 대한 사랑을 허락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화가 나서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 실망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이 부재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세상이 요지경인 것은, 하나님이 무능하거나,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거나,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이란 존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인간 고통의 문제와 아무리 소녀를 사랑해도 소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부정했다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선지자들을 부정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된 다른 하나의 결정적 이유는 과학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현대인의 상식으로 성경과 기독교 신학이 난센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수능 국어 지문을 읽는 것처럼 읽으면, 역사서나 과학서와 동일한 장르라기보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된 단군신화와 같은 장르라고 판단이 되었다.


30대 초반 나는 당시 국내 최대 무신론 커뮤니티 활동을 했다. 무신론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주요 논객 중 하나였고, 오프라인 모임에도 나가서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와 비이성적 비과학적 사고들을 비판하며 무신론자들과 친목을 도모하였다. 한 번 무신론자가 되면 대개는 평생 무신론자로 살지만, 무신론 그룹은 고양이와 같아서 교회처럼 그 모임이 지속되지 않는다. 잠깐 필요에 따라 활성화되었다가 각자 삶을 살면서 모임은 소멸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무신론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말이다. 내세에 천국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자기 살아가기도 바쁜데,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책을 읽으고 토론하고, 대화를 하며 삶을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로 살다가 부모님께서 슬퍼하시는 것 같아서, 교회에는 다녀드리기로 했다. 조울증으로 방황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도 늘 사랑해주시고 기도해주시고 언젠가 회복될 것이라고 믿어 주셨던 분들은 우리 교회 식구들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교회로 돌아왔다. 믿음이 생겨서 돌아왔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만 예수님 믿는 척하고, 세상 떠나시면 한국의 리처드 도킨스가 되어서 종교로부터 대한민국 국민을 해방시켜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교회처럼 정기적으로 무신론자들이 모여서 같이 삶과 생각을 나누고, 함께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고, 확대 가족처럼 사는 세속적 인본주의 무신론 교회를 만들고 싶었다. 부모님을 위해 교회를 다니고 믿는 시늉만 해드렸다. 믿는 자유를 제한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고, 믿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모든 사람에게 가져다주고 싶었다.


나를 사랑해준 유일한 여자 에미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가 신앙의 근본적 척도는 아니지만, 아내는 태어나서 단 한 방울의 술도 안 마셨다. 아내가 어렸을 때는 힌두교인이었다. 매주 힌두교 사원에 나가 동물의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 그런 의미에 독실한 힌두교 신자도 아니었을뿐더러, 평생 단 한 번도 힌두교 사원에 가지는 않았지만, 명절 때 이마 위에다가 빨간 점찍고 축제하는 그런 정도의 문화적 힌두교 신자였다. 동네 교회에 재미 삼아 다니다가, 17살에 하나님을 만나 영접하고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었고,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또한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은 아니었다. 혼자 순대국밥 먹을 때 맥주 한 병 또는 막걸리 하나 시켜 반주로 마시는 정도였고, 술보다는 사람들과 술 마시는 분위기를 즐겼고, 회식이나 친구 만날 때 술판이 끝날 때까지 술잔을 놓지 않았을 뿐이다. 말술은 아니었지만 술판이 끝날 때까지 술잔을 꺾으며 끝까지 살아남는 정도의 주량이었다.


아내와 결혼 후에는 술을 안 마신다. 결혼 초기에는 정말 마시고 싶은 날에는, 마트에 아내 심부름을 갔을 때 아내 모르게 맥주 한 캔 마시고 입을 쓱 닦고 왔다. 언젠가 아내가 킁킁킁하며 내 입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면서 '오빠, 이거 무슨 냄새예요?' 하고 들키고 난 후에는 그렇게 마시는 것도 끊었다. 지금은 아내를 위해 교회를 다녀주는 것은 아니고, 아내를 만나 결혼한 이후 다시 아내가 사랑하는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내를 만나고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살아가는 소년이었을 때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지금 나는 그때 내가 아니어서 총신대 신학과가 어울리지 않지만, 그때 나로서는 총신대 신학과에 갔어야 했다. 그것이 지금의 최선은 아니지만, 그때의 최선이었다. 최근에도 낮에는 직장 다니면서 일하고, 밤에 야간 신학대학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여, 주중에는 일하고 야간과 주말에는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목사님이 되어서도 주중에는 회사를 다니거나 개인사업을 하고 , 야간과 주말에 글을 쓰며 목회활동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교회에서 사례를 받지 않으시고,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면서 개척교회를 하셨던 것처럼, 나는 내 일하면서 목회를 하는 생각도 잠깐 보았다. 직장을 가지고 비즈니스를 하는 것도, 목회 의 연장 선상에서 하고 싶었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목회라는 노동의 대가로 당연한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다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전도를 한다고 전도가 되지도 않고, 주간에는 삶의 현장에서 내 일을 하고, 야간과 주말에 글을 쓰고 목회를 하는 목사도 한 명 즈음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목사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목회도 전문적인 일로서 외부에서 보기에는 먹사라고 먹고 노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다른 직장인들처럼 치열하게 목회를 한다.


나는 그런 목회를 하고 싶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과 주말에는 글 쓰고 사역을 하는 목회를 하고 싶었다. 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런 목사님이 되고 싶었다.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는, 아내 에미마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 사모님이라고 했다. 아내가 내가 목사님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푸시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아내가 가장 원하는 바는 내가 목사님이 되는 것이다. 잠잠히 고민을 해보았는데 내게 그 길은 이미 지나갔다.


주변에서는 모두 내가 목사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영어교육과를 추천하신 것도,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 하라고 보내신 것보다, 영어교육과 졸업하고 신학대학원 졸업해서 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할 수 있는 교사 자격증을 가진 목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다 때가 있고, 이미 그 길을 나는 벗어났다. 나는 전도사가 되는 대신에, 지금 교회 집사가 되었다. 목사가 되는 길보다, 장로도 말고 그냥 집사로 사는 갈림길로 꺾어지기로 했다. 지금은 동생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면서 동생의 성공을 돕는다. 퇴근 이후에는 출간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쓴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할 일을 찾기 위해 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목사가 되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