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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Mar 01. 2021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중학교 고등학교 때 나의 꿈은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학생회장을 했고, 학교에서는 특별활동 동아리 기독학생반 부회장을 하였다. 내가 다닌 학교는 사립 미션스쿨이 아닌 국공립 학교였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단 담당 선생님과 학생들이 있어 기독학생반 동아리가 있었다. 교회 안 다니는 친구들을 전도해 기독학생반에 가입시킨 것은 아니고, 원래 교회 열심히 다니는 아이들이 기독학생반 동아리에 모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섬에서 살다가, 중학생이 될 때 도시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였다. 섬에서 살면서 중학교 공부를 미리 하지 못해, 중학교 올라와 도시 학생들보다 뒤처진 것 같아 불만일 때도 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섬에서 신나게 놀았으면서 그런 소리하지 말라 하신다. 초등학교 공부를 안 해서 뒤쳐진 것은 아니었도, 도시 아이들 만큼 공부를 열심히 했고 잘했다. 초등학교 때 학원 다니며 중학교 공부를 미리 하지 못해 뒤쳐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된다. 선행학습을 안 해서가 아니라, 중학교 진도를 소화하며 따라가지 못해서 초등학교 때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뒤쳐진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어머니께서 옆에다 앉혀 놓고, 이달학습 다달학습 전과를 꺼내놓고 완전학습을 시켜 주어, 시험 보면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틀릴 문제가 없었다. 중학교 가면서 학원을 다니지도 과외를 받지도 않으면서, 자기주도학습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뒤쳐졌다. 부모님께서 경제적 형편과 어떤 신념으로 학원 과외를 안 시켜주신 것은 아니었고, 학원과 과외를 몇 번 시도해 보았는데 내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부모님께서도 억지로 시키시지 않으셨다. 혼자 공부하는 자기주도학습법을 몰라서 뒤쳐졌다 해서도 안 된다. 자기주도학습법도 꾸준히 지속적으로 집중해서 공부하다 보면 생긴다. 모든 일이 그렇다. 어떤 분야에 대한 근육과 신경과 재능도 꾸준히 특정 강도 이상으로 하고 또 하다 보면 생기는 것이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중학교 와서 학교 진도에 맞추어 학습 내용 전체를 완전히 이해하고 필요한 부분을 암기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완전학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 면에서는 초등학교 때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쳐진 것일 뿐이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실패한 것은 아니다. 공부를 잘한 것 까지는 아니지만, 고 3 때 첫 수능 때 전국 상위 15% 정도 하여 총신대 영어교육과 추가합격이 되었는데 안 가고 재수를 했고, 재수했을 때 전국 상위 9% 정도 하여 당시 간절한 소망이었던 포항의 한동대에 가지는 못했지만 강원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을 정도면,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어느 정도는 한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논 것도 아니고 공부한 것도 아니고 애매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다. 공부도 학생으로서 본분은 했다. 공부에 손을 놓지 않았으나, 의식은 육체로부터 가출해 어디론가 흘러가 있었고, 엉덩이만 의자에 붙이고 있었을 뿐이다. 교과서와 문제집을 혼을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무거운 교과서와 문제집을 책가방에 지니고 다녔는데, 군대에서 군장도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 교과서와 문제집을 한 수레를 가지고 다녀도 공부 안 하면 도루묵이지만, 손에 책을 들고 의자에 엉덩이와 등짝이 붙어 있으면, 가출했던 영혼도 육체를 따라 책상 앞에 책으로 다시 돌아온다. 공부는 열심히는 했지만 교과 내용을 소화할 만큼 완전학습이 되지는 못했다. 다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다. 청소년 시기에 치열하게 공부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다. 10대 때 공부를 안 해서 그동안의 인생이 실패했었던 것 또한 아니다. 20대 초반에 조울증이 찾아왔고, 나와 가족이 조울증에 대해 잘못하여 적적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대학 때 전공을 열심히 공부하여 평생을 먹고 살 전공 실력과 전문성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울증이란 질병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조절하는데 실패하여, 간신히 잡은 전공을 살린 좋은 직장 경력이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10대 때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고, 20대 때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고, 30대 때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고, 40대 때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고, 그 이후에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다. 인생유전으로 2030 청춘의 빛을 잃어버리고 20년을 살았으니, 40대인 지금부터 빛을 발하기를 간절히 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지만, 10대 때 나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인생에 실패했던 것은, 공부를 안 해서가 아니라, 20대가 시작하면서 조울증으로 아파서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갈길에서 일어나 이제 꽃길을 걷고 있는 나는 20대 꽃다운 청년에서 40대 배 나온 아저씨가 되었다.


섬에서 나와 1기 신도시 평촌 아파트로 입주하기 전 아파트를 짓고 있는 동안 안양 호계동에서 살았다. 새 교회를 찾을 때 일부러 대형교회를 찾아간 것은 아니었고, 그 동네에서 목사님 말씀이 좋은 교회를 찾다 보니 호계동 그 동네의 대형교회에 가게 되었다. 우리가 분양받아 입주한 평촌 아파트 근처의 좋은 교회를 찾아갔어야 했는데, 우리가 선택한 교회는 입주 전 잠시 살던 동네의 목사님 말씀이 좋은 대형교회였다. 주일학교 중고등부에 열심히 다녔고, 대예배 성가대에 들어가 성인 어른 성도님들과 함께 한 주도 빠지지 않고 활동하였다. 고2가 되어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회장이 되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학생회장을 담당 목사님과 선생님들이 뽑기도 하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학생들의 선거를 통해서 뽑았다. 담당 목사님이 선출하는 것과, 학생들이 선출하는 것, 어느 하나가 옳다고 할 수는 없고, 저마다 장단점이 있다. 내가 재미있고 인기 있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착했고 신앙 좋았던' 이미지였었던 것 같다. 또래가 학원과 과외와 연예인을 따라다닐 때 교회 성가대를 했고, 주중에도 교회에 가서 목사님과 성경공부를 했다. 교회 중고등부 학생회에서는 회장을 했고, 학교 기독학생반에서는 부회장을 했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 특별활동으로는 RCY를 했다. 보이스카우트 비슷한 것이다. 교회를 가야 했기 때문에 일요일 주일에도 캠핑이나 활동을 했던 열성 회원은 아니었고, 1주일에 한 번 특별활동 시간에 활동을 했다. RCY 같은 활동을 하면 보통 선후배 동기 사이가 돈독할 텐데, 전혀 기억나는 선후배 동기가 없다. 담당 선생님만 어슴프레 기억이 난다. RCY를 담당하는 선생님 밑에서 1주일에 한 번하는  모이고 헤어지는 그런 평범한 학교 특별활동 동아리였다.


고등학교 때는 특별활동 동아리로 기독학생반에 들어갔다. 교회 다는 선생님 한 분이 기독학생반을 만드셨고, 기독학생반 회원 학생들은 담당 선생님의 전도로 가입한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 원래 교회 다니는 집에서 교회 다닌 아이들이었다. 1주일에 1시간 특별활동 시간에 교회 주일학교와 비슷한 활동을 했다. 예배드리며, 성경 읽고, 찬양하고, 목사님 초청해서 설교 듣고, 게임도 하고, 일 년에 한두 번 공휴일 학교 쉬는 날 야유회도 가고, 그런 모임이었다.


기독학생반 안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기독학생반 모임을 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신앙이 깊은 학생들이 있었다. 우리들끼리 자체적으로 찬양선교단을 조직했다. 학교와 상관없는 우리들끼리의 사조직이었다. 주 5일제가 실행되기 이전이라서, 토요일엔 오전 수업을 했을 때였다. 오전 수업 마치고 학교 근처 교회 교육관을 빌려 모임을 가졌다. 찬양 연습도 하고, 같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신앙 활동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모임이 끝나면 같은 학교 남녀 학생들이 모여 다니며 떡볶이 사 먹고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놀았다. 모임 안에 이성교제를 금지하는 룰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임 안에서 개별적으로 사귄 커플은 없었고, 소년 소녀들이 모여 '그룹으로' '거룩한' 이성교제를 한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중에도 매일 학교 복도의 빈 공간에 모여 성경을 읽고 감동되는 말씀을 나누는 QT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매일 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학교 앞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여름 겨울 방학 때 교회를 빌려 친구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는 찬양콘서트를 했다. 학교 축제 때 무대에 나가 율동을 하며 교회 노래 CCM을 불렀다.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우리 모임에 들어오기를 바랐던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형식적으로 모이는 다른 동아리들과 달리, 모여 다니며 재미있게 학교생활을 하는 우리에 대한 부러움과 호기심이 있었다.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외부 사람들에게 동화되고 싶지는 않지만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1학년 때는 학교 특별활동 동아리 기독 학생반과, 우리끼리 사조직 찬양선교단 활동을 병행했다. 2학년 때는 학교 기독학생반 부회장과 교회 중고등부 회장을 맡게 되면서, 찬양선교단 활동은 소홀하게 되었다. 기독학생반 회원은 1주일에 1시간 특별활동 시간에 참석하는 것으로 끝이었지만 임원은 달랐다. 모임을 주관해야 하기 때문에, 주중에도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여러 번 모여 회의도 하고 준비를 해야 했다. 사실 돌이켜 회상해 보면 1주일에 한 번 모이는 것 크게 준비할 것이 없었을 텐데, 찬양단에 대한 열정이 꺼진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도 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공부는 남들 하는 만큼 그렇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그 시절 나의 일은 공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교회와 동아리 활동 다 하면서, 고3 때 총신대 영어교육과 추가합격이 되었는데 안 가고, 재수하여 강원대 영어교육과에 가고, 그 정도면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괜찮았었지 싶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던,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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