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다함 Mar 01. 2021

스물한 살 조울증에 걸렸다

2000년 스물한 살 군대에서 조울증이 찾아왔다. 첫사랑 소녀를 향한 짝사랑은 상사병이 되었고, 군대 가서 정신적인 괴롭힘을 받으면서 고문관 관심병사가 되었고, 그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조울증에 걸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강원도 양구에서 군생활을 했다. 평생 운동 한 번 안 했고, 몸을 쓰고 힘을 쓰는 일을 잘 못하는 내가 훈련을 잘하지 못해서 교관들에게 혼나기는 했지만, 훈련소 생활은 재미있었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고참 없이 동기들끼리만 같은 내무반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내가 잘못해도 동기들이 전우애로 도와주고 위로해 주었다.


우리 사단에는 3개의 연대가 있었다. 2개 연대는 GOP 경계근무를 서는 GOP 연대고, 1 연대는 예비 연대였다. 주로 경계근무가 임무인 GOP 연대보다, 매일 양구의 험준 산령을 타 다니며 매복 훈련을 하는 예비 연대가 스트레스도  받고 육체적으로도 더 들었다. 나는 매일 산으로 매복하고 다니는 예비 연대 출신이었다. GOP 출신동의할지는 모르겠다. 항상 자기가 있던 부대가 가장 힘들고 힘든 부대이기 마련이다.


감당할 만한 체력이 되고, 부대원과 관계가 좋으면, 사무실에서 행정병 하면서 정신적으로 군 간부들에게 까이는 것보다, 별생각 없이 하루 종일 산 타다니는 것도 좋다고 한다. 다 자기에게 맞는 일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생활에서 자기에게 맞는 일만 할 수는 없다. 영혼은 육체로부터 가출하여 첫사랑 소녀에게 가 있고, 평생 운동을 한 적이 없어 근육 한 점 없는 내가 그러한 애당초 감당할 수 없는 부대였다.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신학적 이론이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과 믿음이지, 살다 보면 감당하지 못할 시험도 찾아온다는 것이 실제요 현실이다.


몸이 힘드니 부대원들은 항상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훈련 잘 받고, 일 잘하고, 부대원과 잘 어울리면, 크게 뭐라고 하지 않는데, 그것을 못하고 똥을 싸고 있으니 같은 내무반을 쓰던 소대 고참들도 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누구 하나 어리바리한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맞은 적은 없지만 수도 없이 때리려는 시늉을 했고, 돌아가며 나를 갈구고 욕을 하고 화를 내었다.


딱 한 명 나를 감싸주고 위로해 주던 고참이 있기는 했었다. 짬밥이 얼마 안 되어 나랑 계급이 차이가 나지 않아서 나를 보호해 줄 서열이 되지 않았을뿐더러,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했지만 행정병이어서 다른 곳에서 일했기 때문에  도움은 되지 않았다. 얼빠진 상태에서 입대한 나는 군대에서 고문관이라 불리는 관심병사가 되었다.




날마다 나를 괴롭히는 부대원들이 미웠다. 부대 생활 너무 힘들다고 영창이나 군기 훈련소에 보내도 좋으니 다른 부대로 옮겨 달라고 윗선에 소원수리를 할 마음이 목까지 차 있었다. 나는 신병이었기 때문에, 아마 소원수리를 올렸었더라면 내가 아니라 선임들이 징계를 받았을 것이고, 부대가 한 차례 홍역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 마음에 골병이 들자면 나만 골병들자." 이런 마음이 찾아온 바로 다음 날 선임들이 나에게 물었다. "혹시 너 위에 아는 빽이 있니?"라고 물었다. 쓸 만한 빽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전출명령이 났다. 매일매일 산을 타 다니는 보병부대에서, 논산 신병들이 자대 배치를 받기 전에 쉬어 가는 사단 보충대의 관리병으로 전출이 났다. 사단 보충대를 쉽게 말하자면 군 휴양소이다. 보병부대 소총수에서 군 휴양소 관리병으로 전출이 났다. 옮겨간 사단 보충대는 훈련이 전혀 없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유격훈련 조차 없었다. 굳이 훈련이 하나 있다면 식목일에 나무 심는 것 밖에 없는 그런 부대였다. 사단 보충대 대원들이 딱 10명도 되지 않아,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아빠 찬스를 쓸 빽도 없었다. 나중에 대략의 사정을 들어보니, 보충대에서 병사들 간에 사고가 났었다. 워낙 소문난 편한 부대이다 보니 높으신 분들의 자제들이 빽 써서 오던 부대였다. 군기가 빠져서 부대를 해산시키고 재편성해야 할 만큼의 큰 사고가 터졌던 것 같다. 그 사고로 내가 그곳으로 차출된 것 같다. 사단 전체에서 뺑뺑이 돌려 운 좋게 재배치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다. 사단 인사 시스템에 심각한 관심병사로 재배치가 필요한 자원으로 이미 올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수준 이상의 심각한 관심병사에 대하여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도 어떤 식으로든 관리하는 시스템이 모르긴 몰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사단 보충대에 사고가 나고, 보충대를 재구성을 하면서, 신병 이병의 계급에 해당하는 몫으로 사단 인사담당자가 나를 선발했었을 수도 있다.




처음 부대는 지옥이었고, 옮겨간 부대는 천국이었다. 고참들도 처음 부대는 악마들이 모여 있었고, 옮겨간 부대는 천사들이 모여 있었다. 옮겨간 부대 고참들은 나를 친동생처럼 아들처럼 사랑해 주고 아껴 주었다. 최악의 부대에서 최고의 부대로 옮겨간지 1주일 만에 첫 조울증 에피소드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 왔다.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와서, 이 평화로 세상을 고통 속에서 구원할 방법을 개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평화의 방법을 보고 올려서 청와대까지 올라가면, 내일 당장 전 세계의 모든 군인들이 총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내 마음에 평화가 왔으니 그 평화를 이웃에게 전하면 세계평화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사고가 조울증의 조증이다. 정신질환으로서 정신과적인 치료가 필요한 조울증기분이 좋다가 나쁘다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기분변화는 일반인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조울증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은 과대망상이다. 조울증은 양극성 기분장애라서, 기분이 너무 고양이 되어서 일반적인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과대망상이 오게 된다.


세계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았다고 중대장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때 찾은 세계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지금은 완전히 잊어버려 기억에 나지 않는다. 중대장에게 보고를 하면, 청와대에서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대장은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함아, 좋은데 가자!"고만했다. 자신의 차를 태워 어디론가 나를 데려가면서, 편의점에 들려 아무거나 마시고 싶은 것 하나 마시라고 다. 나는 제일 비싼 것을 하나 골랐다. 청와대로 가는 줄 알았다. 가보니 군 병원이었다. 주사를 한 대를 맞았다. 그 주사를 맞으니 인간의 모든 오욕칠정이 사라졌다. 정신과에서 놓는 주사 중 코끼리 주사라 불리는 주사가 있는데, 아마도 그 주사가 그 주사였던 것 같다. 정신과적 증세로 통제가 되지 않는 환자에게는 그 주사를 놓아서, 모든 의욕과 생각을 잠재우는 것으로 치료가 시작되기도 한다. 그 주사를 계속 놓는 것은 아니고, 정신병적 증상으로 통제가 불가능할 때 처음 일회성으로 한 대 놓고, 며칠 격리실에 두면 어느 정도 조절이 된다.


정신병원에 몇 번 입원해 보았던 내가 본 정신병원은, 드라마나 영화에 보는 것처럼 감옥처럼 독방 만들어 놓고 가두어 두는 곳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정신과 입원 병원은 폐쇄병동이지만, 그 폐쇄라는 것이 병원과 층의 입구를 폐쇄한다는 것이지, 환자들의 방을 폐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병원 입구나 층 입구에 철문이 있다는 것 외에는 일반 병동이랑 똑같다. 같은 층의 환자들이 거실을 함께 공유하며, 거실에서 TV도 보고 책도 보고 이야기도 하고 프로그램도 한다. 필요할 때 자기 방 자기 침대에 가서 쉰다. 격리실이 있기는 한데, 난동을 피우거나 자신과 타인을 상해하는 경우에, 폭력성을 조절하는 시간만큼 의료법 안에서 격리해 둔다.




조울증은 지랄 같은 병이다. 상황에 따라서 우울증보다 심각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더 다. 군대에서 조울증이 처음 발병한 지 20년이 되어가는 조울증과 함께 살아가는 환자 입장에서, 조울증은 어려운 질환임과 동시에, 쉬운 질환이어서, 약물치료가 절대적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약을 먹으면 괜찮고, 약을 안 먹으면 먀우 심란해진다. 현재 조울증은 완치의 개념은 없지만, 약을 꾸준히 먹으면 충분히 조절이 가능한 질병이다.


많은 환자들과 가족들이 조울증에 대하여 잘 몰라서, 약이 부작용을 가져오는 것 같아서, 여러 가지 이유로 약을 끊고 재발하여 슬픈 인생을 산다. 약의 부작용이라는 것이, 살이 찌고, 손이 떨리고,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것 같고, 그런 정도의 부작용인 것이다. 살이 찌면 밥양을 줄이고 운동을 하고, 손이 떨리면 손 떨리는 부작용이 없는 약으로 약을 바꾸고, 삶의 의욕이 떨어지면 더 열심히 활동을 해보거나 잠시 좀 느슨하게 요양하면서 시간을 보내도 된다. 약을 안 먹고 이 재발되어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를 치느니, 어느 정도의 부작용은 감수하거나, 약을 해당 부작용이 없는 바꾼다던지 하는 다른 방법으로 부작용을 극복해야 한다. 나는 현재 오랜 기간 꾸준히 약을 먹고 있는데, 기분 조절도 잘 되고 있고 부작용도 전혀 없다.




조울증이란 병에 대한 무지로 적적한 치료를 꾸준히 받지 않아서, 조울증으로 긴 방황을 하다가, 13년 반 만에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조울증으로 방황하는 동안, 학교에 등록해 놓고 수업에 나가지 않아서, 학사경고 정도가 아니라 0.0 ALL F를 몇 학기 받았다. 우리 학교 우리 학과는 낮은 학점 때문에 제적당하는 일은 없었다. 학비만 내면 졸업시켜주는 학교도 아니었지만, 졸업학점 이수할 때까지 학비를 내고 다니면 졸업할 수 있었다. 조증이 심할 때 교생실습과 졸업을 앞두고 자퇴를 해서 수수료를 제하고 등록금을 반환받아 다 써 버렸다. 자퇴를 한지 얼마 안 되어 부모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재입학을 바로 해두신 덕분에, 나중에 회복되어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복학하여 남겨 둔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하여 대졸이 되었다.


조증의 또 나의 대표적 증세는 돈을 쓰는 것이다. 정상적인 범위에서의 소비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가져다 쓰기도 한다. 또한 온전한 정신이었을 때 지키고 살았던 선을 벗어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지만, 보통 사람들은 저마다의 선을 가지고 살아간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하여 선을 넘으면 삶이 꼬인다. 보통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사는 그 선을 훌쩍 뛰어넘는다. 조증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쓰는 것과 보통 사람의 윤리적 도덕적 선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 같은 선상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평소에 생각 조차 하지 않던 에, 자신의  모든 돈을 써 버린다. 대체 무슨 일에 그렇게 모든 돈을 펑펑 쓰고 다녔는지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려 한다. 기억나는 것도 있고, 기억나지 않는 것도 있다.




조울증의 정점에서 나의 모든 돈을 다 썼다. 어머니께서 내 이름으로 들어 놓으신 주택청약 계좌를 귀신 같이 발견하여 위약금 물고 해지하여 그 돈을 다 털어 먹었다. 액수 그 자체보다 결혼 후 아파트 분양 우선순위를 날려 먹었다.


돈 한 푼도 없이 춘천의 메인 상권의 신축한 상가를 분양받는다고,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분양사무실에 상담을 받으러 었다. 돈이 한 푼도 없었기 때문에 실제 계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열심히 상담을 받으며 설명을 듣고 돌아서는데, 한창 상담하던 상담원이 나에게 도대체 어느 정도 돈이 있길래 망설이냐고 슬쩍 떠 보았다. 나는 인테리어 초기 경비 등등 사업자금으로 손에 들고 있는 돈이 총 10억 밖에 없어 계약이 어렵겠다고 둘러댔다. 부동산 시세를 지금도 잘 모르지만, 춘천의 중심상권이라도 작은 샵을 시작하기에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춘천 중심가 목 좋은 곳에 잘 지은 신축건물이었는데, 분양 후 건물 전체가 부도가 나서 빌딩 전체가 망했다. 돈을 구할 수 있어 거기에 털어 넣을 수 있었다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인생 종 쳤을지도 모른다.


또 한 번 조울증 에피소드가 심하게 찾아왔을 때, 강남역 인근에 프리미엄 럭셔리 고시텔 방 하나 얻어 놓고, 그동안 모아 둔 돈을 며칠 새 다 쓰고 다녔다. 나는 정치를 한다며 돈을 쓰고 다녔는데, 결과적으로 엉뚱한 곳에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녔다.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조울증 상태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상이다. 의미 있는 곳에 돈을 쓴다고 생각했지만, 엉뚱한 곳에 가서 엉뚱한 사람들을 만나며 돈을 뿌리고 다녔다. 모든 조울증 환자가 그런 것도 아닐 것이고, 조울증 환자들마다 보이는 증세가 천차만별일 테지만, 내가 직접 체험하고 주변의 환자들에게서도 관찰한 대표적인 조울증 증상 중 하나이다.


조울증 환자들이 헛된 곳에 귀한 돈 뿌리고 다니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두운 뒷골목을 걷는 청춘들이 원래 처음부터 내가 장래에 커서 어두운 뒷골목을 누비며 살아야지 하고 인생을 설계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밝은 길을 가기를 원한다. 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뒷골목을 걷고 있을 뿐이다. 부모님의 눈물의 기도와 아내 에미마의 사랑으로 회복한 나는 더 이상 길이 아닌 길은 가지 않는다. 조울증으로 인하여 평소에 내가 지키고 살아왔던 선을 훌쩍 넘었고, 힘들게 모아 두었던 내 통장의 잔고를 남기지 않고 다 썼다. 자본주의에서 자산은 자본 + 부채라는데, 나는 한 푼의 자본도 한 푼의 부채도 없는 자산 제로가 되었다.




바른 길만 걸어온 사람들은 길을 벗어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선 없이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선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인 인생 목표는 아니다. 살다 보니 인생유전으로 자신도 모르게 음지에 터를 잡아 양지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뿐이다. 본인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져야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할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지금 선하게 사는 것도, 오로지 나의 선의지 때문만은 아닌 운이 좋아 그럴 수도 있다. 종교적인 표현으로는 은혜 또는 은총이라고도 한다.


정신이 피폐해지고 정신적으로 병이 들면, 멀쩡했던 사람이 선을 넘어도 한창 넘어 더 이상 선이 없는 도덕성 제로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선을 넘어 도덕성 제로가 되어 내 멋대로 살았을 때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는 범위에서,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려고 했다. 그러나 나의 무제한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의 그늘을 드리운다. 조울증에 사로 잡혀 내 멋대로 살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던 것에 대해서 일일이 찾아가서 사과를 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사과를 할 만큼 결정적인 실수는 하지 않았다.


부모님에 대해서만 제외하고 말이다. 피해자 당사자인 부모님께서 과거를 묻지도 따지지도 기억하지도 않으시고 싹 잊으신 듯이 사시기 때문에, 나중에 나와 아내에게 좋은 날이 오면 부모님 마음에 흡족할 만큼 큰 선물을 해드리는 것으로 사과드려야지 생각한다. 본의 아니게 조울증과 방황으로 인해 내가 잠시라도 피해를 주었던 사람이 있다면, 다른 것으로 값을 길도 이유도 없다. 멋진 인생을 살아서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가 되어서, 나와 과거의 함께 했던 추억이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작가의 이전글 목사님이 되지 않은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